전쟁처럼 무서운 것이 환경재앙이다.
하늘이 연한 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날개를 쫙 펴고 날던 갈매기들이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우뚝 솟아오른 바위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부둣가에 나온 남자들은 몰아치는 폭풍을 걱정하면서 어선에 올라 굵은 밧줄을 동여맸다.
둔중한 군용 트럭이 길 양옆으로 물을 차내며 쏜살같이 달렸다.1) 검푸른 파도가 군데군데 도로를 삼키고 있었다.
연평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군인이었다. 북한군과의 교전 때문인지 섬 대부분은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군용 트럭과 군복을 차려입은 군인들로 연평도는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야말로 군사지역에 민간인이 거주한다는 느낌이었다. 군사시설이 있는 곳에서는 사진 촬영도 허락받아야 했다. 트래킹을 즐기려고 해도 군부대가 있는 곳은 신상명세서를 쓰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교전 후 섬 분위기가 어떻게 변했는지 물어도 주민들은 말을 아꼈다. 교전 이야기에 입을 다문 주민들의 표정에서는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신중함이 느껴졌다. 연평도의 아름다움은 분명 가려져 있거나 혹은 부풀려져 있었다.
마을로 가는 길은 약간 오르막이었다. 조금씩 숨이 차올랐다.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길을 따라가며 숨을 골랐다. 길옆에는 바다이끼가 낀 그물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어업 장비들이 가득했다.
선착장에서 마을로 가는 길은 도보로 20분 정도 걸렸다. 옷섶에 쑤셔 넣은 담배를 꺼내 물고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걸었다. 어렸을 적에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길바닥에서 나뒹구는 소라껍데기를 주워 들고 귀에 가까이 댔다. 바다는 언제나 소라껍데기 속에 있었고, 지금도 그 신화는 변하지 않았다. 가슴을 쫙 펴고 상쾌한 공기를 들여 마셨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구불구불한 길을 바라보니 숙명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제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를 가지고 있어도 인간의 결말은 모두 똑같았다. 날짐승은 날다가 죽었고, 기는 짐승은 기다가 죽었고, 걷는 짐승은 걷다가 죽었다. 최초로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도 불로불사를 염원했지만 거스를 수 없었다. 다만 슬프고 고단한 것이 삶이라 할지라도 누가 더 사색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은 달라질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매달린 이유이기도 했다.
트럭 한 대가 멈췄다. 가무잡잡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남자가 마을로 태워주겠다고 손짓했다.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애정에 찬 눈빛으로 말하는 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차창 문을 끝까지 내려놓고 낯선 곳에서의 드라이브를 맘껏 즐겼다. 그리고 남자의 민박집에 숙소를 잡았다.
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인 듯했다. 개발과 재개발로 하루가 다르게 형세가 변하는 도시와 달랐다. 변한 게 없어 보였다. 폐허가 된 공간도 많았다. 이미 사라진 과거의 장소였지만 머지않아 닥칠 미래의 모습인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삶의 터전이 저렇게 처참하게 버려질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파괴된 인공이 자연과 엉켜 있는 공간을 바라보니 기분은 복잡했다. 수천 년을 내려온 산과 들, 강과 숲, 논과 밭이 사라졌다. 인간은 편해지기 위해 자연을 개발해 왔지만 욕심은 끝이 없었다.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파괴했고, 약자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도 빼앗았다.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에는 환경오염, 메르스를 비롯한 각종 질병, 대지진과 후쿠시마원전사태,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재앙으로 생태계가 고사 위기에 빠졌다. 낙관론자의 눈으로 볼 때, 미래는 영광과 번영일지 모른다. 하지만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는 미래는 밝지 않다. 인류는 과거에 대한 자성도 없이 계속 치고 박는데 열중이다. 서로가 ‘어디 내 손에 한 번 죽어 봐라’는 식으로 열나게 싸우고 있다. 사람들은 지구온난화 등으로 빚어진 이상기후와 환경오염 문제를 ‘인간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자연의 경고’였다.
전쟁처럼 무서운 것이 환경재앙이다. 환경재앙은 낯익은 모든 것들을 파괴했고, 인간이 기대어 사는 터전을 없애버렸다. 이러한 결과를 알면서도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 어리석을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더 나빠지지 않게 지키는 것뿐이다.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를 할 때가 됐다. 나는 미래가 어떻게 될지 미리부터 근심하지 않는다. 미래가 첩첩산중 같아도, 현재의 어려움을 하나하나 극복해 가면 될 일이다.
연평도에서마저도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 하나 같이 회색빛으로 보였다. 나는 먼바다와 어두컴컴한 하늘, 끝없이 우거진 숲을 보면서 저절로 자연의 서늘한 카리스마에 빨려 들었다.
1) 군용 트럭이 옆을 생생 지나다녔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분단 조국의 현실이 어떠한지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 여행 온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나는 이곳에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작품 절규를 보면 깊은 좌절에 빠진 현대인들이 생각난다. 사람은 한없이 성숙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생존을 위해서만 살다가는 스스로 암흑에 갇히고 만다. 우리에겐 변하지 않는 미래를 만들 책임과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그려나가야 할 사명감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현재에만 있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과 후대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잘 가꾸는 것은 어쩌면 가장 큰 삶의 에너지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독한 욕구불만에 휩싸여 있다. 생명의 뿌리를 죽이는 재앙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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