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개망나니의 사색

029.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 조각난 마음

이동권 2024. 3. 14. 14:27


사람들의 노고를 쉽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뿌연 안개가 걷히자 연평도가 눈앞에 보였다. 연평도는 어느 작은 도시의 터미널처럼 분주했다. 여객선을 기다리는 군인과 경찰, 여행객과 섬 주민들이 서로 엉켜 모여 있었다.

 

나는 선착장을 보면서 오랫동안 침묵에 잠겼다. 고적한 섬에서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길에서 보시락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은 정적과 만나고 싶었다.

 

착각이었다. 연평도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던 기대가 단숨에 증발됐다.


나는 단조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나를 내보이고, 뭔가 재밌는 일도 꾸며 봤지만 삶은 정겹지만은 않았다. 그저 그렇고 그런 일상만 계속해서 이어질 뿐이었다.

 

나에게 삶의 희열을 알려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자기 혼자 누리기에도 너무 모자랐던지, 아니면 아예 인생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고 앞만 보며 살았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모든 결과를 예측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원했고, 그렇게 되지 않거나 꺾였을 때는 좌절했다. 오만과 염려, 불안감이 만든 사회적 병리현상이었다.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악수를 두고 여러 가지 공격과 도전에 불복해 좌초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생명이 다할 때까지 최선의 것이 되기 위해 전진하고, 실험과 파격을 넘나들며 비이성과 비도덕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이 바로 인생이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예술가나 혁명가들이었다. 예를 들어 화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익숙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랬고, 앙리 루소와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랬다. 모두들 엉뚱했고 괴짜였다. 빈센트 반 고흐 같은 경우는 그 이상의 파격이었다. 그는 한때 성직자의 길을 열망하는 청년이었지만 신경쇠약을 앓다 자신의 귀를 잘라냈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한마디로 파란만장했다.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의 삶은 달랐다.1) 예술가라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기술자처럼 살았다. 르누아르는 오롯이 장인의 길을 걸었다. 부족한 것 없는 예술가로 살았고, 화가로서 명성을 누렸다. 르누아르의 일상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깨끗하고, 고상한 예술가의 표본이었다. 그의 작품도 피로를 느끼게 하거나 싫증을 유발하지 않았다. 유연한 빛깔과 형상으로 사람들에게 행복과 평온을 선사했다. 그러나 세상 풍파에 휘말리지 않았던 르누아르에게는 화가 그 이상의 매력이 발견되지 않았다. 소박하고 평온한 삶의 태도가 죽는 날까지 값진 것이라고 해도, 그러한 삶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삶은 도전할수록 파편이 튀기게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르누아르의 삶은 도식적이었고 자기 방어적으로 보였다. 


르누아르는 평생 행복과 기쁨의 순간을 그렸다. 사회 문제나 인간 내면의 고통보다는 풍성한 몸매의 나체 여성들을 소재로 외면적인 즐거움과 행위만을 화폭에 담았다. 두 아들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당시에도 르누아르는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볼 때마다 명화가 꼭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의 원화를 직접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행복한 여성이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켰다. 아니면 역설일 수도 있었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과도한 행복과 기쁨의 순간으로 비틀어 담아낸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끝없는 절망을 넘어서려는 희망과 상처를 감추기 위한 인내가 그의 그림 속에 내포된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연평도는 겉으로 보면 르누아르의 그림과 비슷했다. 바다 위로는 하얀 갈매기들이 맴돌이쳤다. 근해에서는 고기잡이 어선들이 풍어를 기원하며 떠다녔다. 곳곳에는 개발되지 않은 관광자원이 즐비했다.


속을 들여다보면 판이했다. 연평도는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닮았다. 이곳은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 아우성과 비명 소리가 사라지지 않은 전장이었다. 포연에 휘덮이고 총탄이 빗발치며, 통곡 소리가 끊이질 않고 향을 태우는 냄새가 번지는 자리였다.


1) 르누아르는 13살 때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대성할 화가의 면모를 보였다. 청년기에는 아틀리에에서 세잔, 피사로,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를 형상화했다. 이후에는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면서 세계가 주목하는 명화를 완성해 나갔다. 늙어서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와중에도 손가락에 붓을 묶고 그림을 그리면서 죽는 날까지 창작의 기쁨을 누렸다. 르누아르의 그림은 보고 있으면 황홀하다. 눈동자를 빨아들이는 보드라운 장밋빛 광채, 물속을 노니는 비단잉어의 샛노란 타오름, 빛이 확 번지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짙은 남색 그림자, 보드랍게 가지를 늘어뜨린 채 가볍게 말려 들어간 나뭇잎의 푸름. 이 모든 색채가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들면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몇 달 전 바이올린을 샀다. 음악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해 보니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주 쉽게 보였던 연주가 사실은 피를 쏟아내는 고통 뒤에 얻은 결과였다. 실력이 좀 늘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술 때문이다. 과연 다음 여행에는 바이올린을 들고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