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품위는 이해와 배려에서 발견된다.
도착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바다 위에서의 정취를 느껴보기 위해 갑판에 나왔다.
연인으로 보이는 여자와 남자가 나란히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여자가 입은 원피스가 바람에 날려 자꾸 눈길이 갔다. 파란색 바탕에 하얀색 땡땡이 무늬가 도드라진 복고풍 원피스였다.1)
동그라미는 원만하고 편안한 느낌을 줬다. 더럽거나 추하지 않고 아름다웠다. 또 전쟁이나 불안, 죄악이나 질병, 혼란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밝고 희망차며 즐거운 상태를 연상시켰다. 동그라미는 개인, 가정, 국가, 세계의 안녕처럼 긍정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는 고통과 절망, 번뇌와 허무로 고통받는 인간의 구도이자 유토피아를 상징했다. 조금만 더 생각을 확장하면 공기, 물, 땅, 구름, 비, 바람 등 모든 자연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경이로운 자연을 뭔가 대단한 것으로 비유하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꼈다. 하지만 딱히 근사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동그라미만큼 적합한 이미지를 찾을 수 없었다.
세상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했다. 모가 난 도형처럼 서로의 입장이 부딪치고 갈등이 악화되면서 역사는 이어졌다. 동그라미처럼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이 서로 어우러지며 상생해 왔다면 지금까지의 역사와 역사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다. 동그라미를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갈등에서도 화해를, 분쟁에서도 평화를 구했다. 시냇물이 강물이 되고, 강물이 흘러 바다에 모이는 것처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힘을 모았다.
연인은 행복해 보였다. 나는 깊고 넓은 바다처럼 서로 아껴주고 이해하며, 동그라미처럼 서로에게 모를 드러내지 말고 살기를 빌었다.
주위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부부 관계는 늘 달콤하고 감동적인 시간만을 주지 않았다. 한때는 수정처럼 순수한 빛으로 타올랐지만 갑자기 화산재로 돌변해 평화로운 숲을 덮치기도 했다. 겉으론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아도 그 안에 진심 없는 대화, 의미 없는 구애, 필요에 의한 헌신, 이기적인 적의, 배우자에 대한 강박, 뿌리 깊은 불신이 쌓여 있기도 했다. 모든 관계가 그랬다. 관계는 환희나 행복, 꿈이나 눈물, 아니 인간적이라고 불리는 모든 즐거움을 잉태했지만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슬픔으로 답례하기도 했다.
사랑은 철저히 혼자가 되면서부터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다. 사랑은 욕구나 욕망의 대상도, 자신의 의도대로 만들어 가는 것도 아니었다. 혼인서약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한 지붕 밑에서 산다고 사랑이 되진 않았다. 홀로 서서 사랑이라고 믿는 것을 완전히 내려놓고 바라볼 때야 비로소 사랑이 됐다.
나는 선실에서 배낭을 메고 나갈 채비를 했다. 누군가가 곁눈질로 나를 흘끔거렸다. 앳돼 보이는 얼굴의 군인들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예민해 보였다. 낯선 이방인의 방문이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부류의 사람을 보면 불안을 느꼈다. 해를 끼치지 않아도 눈을 흘기며 위험한 사람이라고 규정지었다.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사회에서 격리하거나 제거했다. 행여 저항하면 불안을 복수의 감정으로 바꿨고 적으로 간주해 버렸다. 손가락질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과 다르거나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냉대가 심했다. 조금만 만만해 보여도 함부로 얘기하고, 헐뜯었다. 사람은 모두 부족하고 다른 존재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절로 우울증이 찾아왔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무뎌졌으나 마음을 할퀸 상처의 골은 점점 깊어졌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본질도 그랬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서로 힘을 합치면 좋겠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을 무조건 진압하고, 소탕하고, 섬멸할 대상으로 여겼다. 이해와 칭찬은 바라지도 않았다. 관용조차 베풀지 않았다. 이것은 휴전선을 그어 놓고 대립하는 분단의 아픔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들은 한결같이 범죄와 내전에 시달리며 분쟁했다.
양심을 짓씹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사상이 다른 이들을 척결하기 위해 살기충천한 세상이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비열하고 야만적인 것들이 일순간 정지되고 단 한 번의 화해로 모든 살의가 없어져 완벽하게 다른 세상이 펼쳐지면 좋겠다.2)
보다 넓은 이해로 사회의 날카로움을 정화하고, 고귀한 사랑을 실천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숨겨진 인간의 가치와 품위를 찾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있어야 가능하다. 적대와 이욕, 폄사는 정당성이 있는 주장이 아니라 한낱 인간이 부리는 악일 뿐이다.
1) 요즘 복고가 유행이다. 경제가 어렵고 소비자들의 불안 심리가 커지면 복고가 유행한다. 복고가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발맞춰 기업들은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2) 경계심을 풀어라. 무서워서 못살겠다. 깨갱. 개팔자가 상팔자라던데, 나는 왜 이모양이냐.
낯선 곳에 여행을 가면 억지로라도 명상을 가졌다. 혼자 질문하고 답하면서 나를 알아 가길 원했다. 삶은 정신의 다스림으로 빚어낸 도자기와 같다. 구도자들이 자기 자신에게 매달리며 해답을 찾으려 했던 수양과도 비슷하다. 나는 내 마음이 잘 빚은 도자기가 될 때까지 여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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