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개망나니의 사색

018. 모래밭을 거닐며 - 완성을 위해서는

이동권 2024. 3. 9. 20:29


일을 반대하기는 쉽지만 성사시키는 어렵다.

 


산길을 걸었다. 눈앞에 부서지는 사유의 조각들을 그러모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청풍이 안내하는 등산로 위로 하얀 깃털 구름이 흘렀다. 정갈하게 수 놓인 새색시 치마폭처럼 깨끗하고, 아무렇게나 휘갈긴 붓놀림처럼 강렬한 구름이었다. 눈도 마음도, 발걸음도 황홀했다. 


나는 봄이 되면 식물들이 맹렬하게 싹을 틔우고, 여름이 되면 형형색색의 꽃을 함빡 피우고, 가을이 되면 알찬 씨앗을 땅에 떨어뜨리고, 겨울이 되면 숨을 고르며 찬 서리를 견디는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고 싶었다. 


도시는 자연의 섭리로 움직이지 않았다. 밤은 대낮처럼 환했고, 공원에는 쥐와 바퀴벌레만 기어 다녔다. 작은 새들이 고독한 밤의 적막을 깨우는 것조차 경험할 수 없는 곳이었다.  뿌연 매연에 가려서 멋진 구름을 볼 수 있는 날도 드물었고, 무엇보다 정신이 산만하고 왠지 모르게 쫓겼다. 나는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과 조우하길 원했다. 어머니에게로 가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비우고 청초하게 만나고 싶었다. 


나는 산에 들어가면 마음이 숙연해졌다. 어지러운 일상을 바로잡고 곪아 터진 상처를 치유하는 의식 같았다. 차고 맑게 휘돌아 나가는 계곡과 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푸른 신록, 자연이 선사하는 예스러운 바람까지 더하면 운치 또한 그만이었다. 


십여 분을 걸으니 등산로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남자가 보였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말을 걸었다. 그도 나처럼 혼자 온 여행객이었다. 남자는 늘 혼자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혼자 여행을 가는 것이 여럿보다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는 더 이상 방해받고 싶지 않은지 길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냥 자연의 넓은 품에 안기고 싶은 것 같았다. 삶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달래 주는 것은 그에게도 역시 자연이었다.


나는 작별인사를 건네고 다시 걸었다. 바위틈에서 손바닥만 한 고슴도치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도망갔다. 산비둘기도 푸드득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숭숭히 자란 침엽수림은 신묘한 형상의 괴석과 어우러져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사람의 마음과 같이 가파르고 완만하기를 반복하는 변덕스러움과 때 묻지 않은 풍경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다. 울창한 숲과 화장한 날씨의 조화는 유달리 일품이었다. 그러나 걱정스러웠다.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자칫하다 교전이 벌어지면 이 산도 움푹 파이고 깎여 흉물이 될 것 같았다.


맑고 푸른 햇살이 시원한 바람을 타고 대나무 숲을 쓸고 지나갔다. 대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을 따라 햇빛에 부서지며 반짝였다. 나는 대나무 숲을 지나면서 창락한 전원생활의 향수를 만끽했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열심히 달려가다 잠시 시간을 내 유유자적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자연의 생동감을 향유하는 감동, 이 세상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아끼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낯선 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여행의 힘은 참으로 대단했다. 


녹색으로 물든 작은 길 위로 마른바람이 불어왔다. 빼곡히 들어선 대나무들이 아스라하게 서로 엉켜 흔들렸다. 대나무들이 참으로 길차게 자랐다. 사관학교 의장대가 사열을 하듯이 오솔길을 둥그렇게 감싸 안았다. 그 사이에서는 참새들이 소나기라도 퍼붓듯이 짹짹거리며 날아올랐다. 나는 대나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대나무는 세상의 모진 풍파에도 아랑곳없이 무궁한 뿌리로부터 자신을 지켰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들처럼 곧고 바른 자세를 유지했다. 함께 모여 숲을 이루고 몸을 부대끼는 대나무의 삶은 한층 더 존경심을 갖게 했다. 대나무는 홀로 오롯이 빛나기를 원하는 인간과 달리 서로 뿌리를 나누고 숲을 이루며 살았다.


나는 3년 동안 여러 사람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프로젝트 규모는 상당했다. 하루아침에 끝낼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모두가 힘을 하나로 모아야 정해진 일정에 마칠 수 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기 처지만 생각하면서 외골수처럼 일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대나무처럼 숲을 이루고 함께 힘을 모아 매진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필요했지만 나조차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내 일에만 빠져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여유가 없었다. 그럴수록 일은 자꾸 꼬여갔다. 


돌이켜 보면 가장 쉬운 것은 내 입장을 내세우며 반대하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 일을 성사시키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이 어려웠다. 나는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표류할 때 제대로 일을 진척시킬 수 없었다. 무언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을 갖고 끊임없이 힘을 보태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믿지 못했고, 확신도 가지지 못했다. 쓸데없는 것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마음을 숨기기 위해 뒷전에 서서 불평할 거리만 생각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니 일은 잘 될 턱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대나무는 나에게 훌륭한 스승이 돼 주었다. 요즘 정치권의 혼탁한 잡음을 보고 있으면 대나무의 고결한 정신은 더욱 간절해진다.



순정, 의지, 믿음, 용기 등등등. 사랑을 대변하는 다양한 단어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엄숙하게 감정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사랑의 정체는 인내와 공경이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다림과 포용력, 상대방의 행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깊은 자혜였다. 나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참고 이해하며 존경하는 마음이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