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개망나니의 사색

014. 모래밭을 거닐며 - 책 읽는 습관을 들이면

이동권 2024. 3. 8. 22:04

 


책 읽기 좋은 계절은 따로 없다.



민박집을 잡았다. 작은 방에는 13인치 TV가 장식품처럼 놓여 있었다. 채널은 지상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마저도 화질이 선명하지 않았다. 옆방에는 한 쌍의 연인이 휴가를 온 것 같았다. 벌써 며칠째 묵은 건지 문 앞에는 갖가지 음식과 식기, 세면도구가 잘 정리돼 있었다.


나는 휴가를 무작정 노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맡겨진 임무나 책임을 잠시 내려놓고 심신을 다스리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휴가를 갈 때면 아주 중요한 일정마저 완전히 잊고 떠났다. 방황과 불면으로 인도했던 일들도 모두 잊고, 일에 대한 열정이나 책임감 같은 것도 내려놓고, 감정을 추슬러 떠났다. 


혼자 떠나는 휴가도 고집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해도 관계없었다. 외로움과의 싸움이 더욱 힘든 사람이라면 휴가는 마음 맞은 친구 두서너 명과 함께 떠나도 좋았다. 기혼자라면 아이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계획해 보는 것도 괜찮았다. 


여행을 떠날 때는 달랐다. 여행은 혼자가 좋았다.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자신과 마주하기에는 혼자가 편했다. 홀로 바닷가에 서서 아득히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용기와 으르렁대는 도시생활을 되돌아볼 의지가 있다면 혼자가 나았다. 


장소는 가리지 않았다. 푸른 나무와 수려한 계곡, 하늘에 닿을 것 같은 봉우리가 즐비한 산도 괜찮았지만 끝없는 사색을 부르는 바다도 좋았다. 특히 섬에서 만나는 바다는 유독 이름 모를 애상에 젖게 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사방이 고립되고 정지된 곳이 주는 고도의 안정감은 진정한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이름 꽤나 있는 남도의 섬들로 떠나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서울에 살기 때문에 시간이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가까운 섬이 현실적이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섬들은 백령도, 연평도, 대이작도, 승봉도, 무의도, 덕적도 등 10여 군데에 이른다. 마을버스가 다닐 정도로 큰 섬도 있고, 군사 시설 때문에 운신하기가 불편한 섬도 있다. 또 수상레저 시설이 들어선 곳도 있고, 백사장이 좋아 물놀이를 즐길 만한 섬도 많다.1)


나는 간단하게 식사하면서 소주를 비웠다. 적적할 때는 소주만 한 친구가 없었다. 해변에서 읽다 말았던 책도 꺼냈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무는 소설이었다. 


밀도 있는 책을 읽는 것은 머리를 가볍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틈틈이 독서를 하면 잡생각도 없어졌고, 몸에도 알 수 없는 기운이 들어찼다. 예를 들면 책 속에서 어느 사막의 오아시스나 열대 바닷가,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어떤 도시를 만나게 되면 그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됐다. 그럴 때 몸에 놀라울 만한 에너지가 생성됐다. 


나에게 독서는 간접 경험의 매개였다. 독서의 범위가 협애하고 양이 빈약하면 배움의 깊이 또한 얕아졌다. 주위를 둘러봐도 독서가로 통하는 사람들의 삶은 예술과 철학을 즐겼고, 현실 처세도 현명했다. 독서는 공부와는 또 달랐다. 목적 자체가 판이했다. 공부만 열심히 하고 독서를 게을리하면 세상사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얻지 못했다. 
나는 관심 분야에서부터 잘 알지 못했던 부문까지 두루 섭렵했다. 젊은 시절에는 책에 파묻혀 살았고, 습작도 많이 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독서에 취미를 붙이길 바랐다. 정서를 살찌우고 지혜를 선사해서만은 아니었다. 책은 재밌을 뿐더러, 삶의 방편도 됐다. 게다가 올바른 비판력도 길러 줬다. 특히 일에 열중하고, 틈틈이 독서하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줬고, 아이의 독서 습관을 기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2) 


나는 학교를 떠난 뒤 사회생활을 하면서 독서에 열중하기 힘들었다. 현실에 얽매였던 탓이었다. 내게 허락된 시간은 주말, 그것도 여행을 떠나지 않은 주말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독서를 못하는 대신 사색을 대안으로 찾았다. 책을 읽는 것처럼 많은 사유로 독서하는 시간을 대체해 왔다. 어떻게 보면 청승맞은 짓이었다. 고독에 찌들고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해방감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마음의 빈곤이 쌓이고 동경이 무르익을 때, 사색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일상에서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3)

 

1) 인천 옹진군은 섬으로 이뤄져 있다. 이곳에서는 바다낚시, 해수욕, 갯벌체험, 등산 등을 즐길 수 있으며, 맛있는 해산물도 맛볼 수 있다. 특히 연평도 꽃게와 백령도 까나리액젓, 여러 섬에서 출하되는 포도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특산품이다.

 

 

 

2) 독서하기 가장 좋은 계절을 얘기하라면 대부분 가을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가을은 청청한 하늘과 선선한 바람에 유혹되기 쉬운 계절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좀이 쑤셔 견디기 힘든 때다. 그래서 선조들은 가을을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했을지 모르겠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고 책을 가까이하길 바라는 충고일 것이다.


3) 나는 약점이 많다.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무척 부끄러운 약점도 있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제 아무리 완벽한 사람도 보완하고, 다듬고, 성찰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한다. 약점을 개선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점점 곪아가다 하나둘씩 터지고, 잘라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자신을 다듬는 과정을 도와주는 것 중 하나가 책이다.



나는 과거의 불행을 기억하지 못해 또다시 똑같은 불행을 경험했다. 과거는 언제나 반복돼 왔다.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대비해야만 똑같은 일로 고통을 겪지 않았다. 그것을 책이 미리 알려줬지만 우둔한 나는 과신과 욕심으로 너무도 쉽게 잊었다. 여전히 내가 실수하고 잘못했던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었다. 개망나니 같은 일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세상이 이 모양인데 내가 왜 거기에 적응해야 할까 홀로 자위했지만 동시에 참담함도 맛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