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개망나니의 사색

015. 모래밭을 거닐며 - 반딧불처럼

이동권 2024. 3. 9. 17:42


삶의 지혜를 선물하는 것은 고난과 역경이다.



10시가 넘으니 사방은 쥐 죽은 듯 괴괴했다. 솔바람 소리만 쏴쏴 들려왔다. 도시였다면 막바지 주객들로 유흥가가 붐빌 시간이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 놓고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자고 싶었다. 하지만 모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방충망이 설치된 창가로 빼꼼히 얼굴을 들이미는 것뿐이었다. 


도시의 밤은 고단했다. 밤마다 옅은 경련에 시달렸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이런저런 일들이 생각나 잠이 오지 않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발자국소리, 자동차 엔진소리, 바람소리도 잠을 방해했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았을 소리도 밤이 되면 한꺼번에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여도, 일어났다 다시 누워도 소용이 없었다. 주위에는 가까운 친구도 없었고, 잠을 자지 않고 버티겠다는 욕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술의 힘도 한계가 있었다.


섬에서는 달랐다. 사색과 성찰이 피로한 가슴을 뜨겁게 덥혔다. 힘겹고 고생스러운 여정에서도 저절로 힘이 났던 것은 반성하고 살피는 마음이 주는 저력이었다. 잠도 곧잘 들었다. 불면과 싸웠던 도시의 밤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숙면에 빠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도 맑았고 몸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눈앞에 멋진 야경이 펼쳐졌다. 노란빛을 등에 지고 사는 반딧불이었다. 반딧불은 풀숲을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나는 순식간에 목가적인 분위기에 취했다. 늦여름 밤 정자에 앉아 별빛 깊은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반딧불은 깨끗한 곳에만 서식하는 멸종 위기의 곤충이다. 수명은 2주. 먹는 것은 이슬이 전부다. 환경이 깨끗하지 못한 곳에서는 살 수 없다. 그래도 반딧불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기 몸보다 큰 빛을 발광하며 날아다닌다. 아련한 몸놀림으로 작은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다 알을 낳고 죽는다. 그런 습성 때문에 반딧불은 도시인에게 구원과 희망, 성찰과 위로의 메시아로 여겨졌다. 특히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 희망을 잃어버린 젊은이들, 먹고사는 문제에 절박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매개가 됐다. 반딧불은 나에게도 똑같은 대상이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1)


과거에 내가 형상해 왔던 미래의 삶을 어느 시점에서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움찔댔다. 다리도 후들거렸다. 뜻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도시를 배회하며 술로 마음을 달랬다. 아니면 빌딩 그림자가 드리운 후미진 도시의 뒷골목에서 상념에 젖었다. 여유가 생기면 자연으로 떠나 삶을 위로했다. 그곳에서 반딧불을 보게 될 때마다 나는 마음이 치유되는 약을 선물 받고 돌아왔다. 


반딧불의 짧고 광영무쌍한 삶은 하등 다를 바 없는 어두운 일상에 희망을 선사했다. 살면서 겪게 되는 고난을 배움으로 변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고난은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가 됐다. 거기에서 인생은 출발했고 끝도 거기에서 맺는 것이었다.


반딧불의 일생은 미신이나 금기 같은 운명에 휩쓸리기보다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인생의 길을 찾도록 인도했다. 가난해도 빛 고운 사람을 꿈꾸게 했다. 또 일생을 살아가면서 아끼고 가꿔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했다. 자연과 함께하는 인간, 자연을 해치지 않은 생활, 자연의 귀중함을 아는 지혜였다. 


나는 산책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일로 미뤘다. 반딧불의 평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수없이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마음으로, 한 순간만을 위해서라도 몸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달라고 다짐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불안한 눈빛, 가빠지는 숨소리는 영락없는 중병인 같았다. 이럴 때는 말초적인 쾌락에 목마르게 됐다. 나는 육체적인 쾌락이 정신적인 쾌락보다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질적 차이는 있겠지만 쾌락의 속성상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쾌락도 정신적인 짜릿함 못지않게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컴컴한 어둠에 몸을 맡겼다.


내 주위에는 홀로 혹은 여럿이 모여 조용하게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가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의 평정심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자연에 귀의한 도인 같은 사람들과 예술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유쾌했다. 별의별 재미와 넉넉함을 느끼게 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면, 그들은 나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지 못했다. 술과 음악이 어우러지고, 세상에 대한 한탄이 이어지는 자리가 자기만족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들과의 시간은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이 정겨웠지만 세상과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행동으로 보여줄 수 없는 말, 사람들과 어깨동무할 수 없는 마음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1) 반딧불은 개똥벌레라고도 부른다. 빛깔은 검은색이고 배마디에 빛을 내는 기관이 있다. 반딧불은 어른 벌레뿐만 아니라 알, 애벌레, 번데기도 빛을 낸다. 가수 신형원은 개똥벌레라는 노래를 불러 가요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문화는 힘의 방향성을 따라 움직인다. 그 힘에는 권력과 자본도 있지만 야만과 시련, 유혈과 공포, 투쟁과 저항 등 수많은 것들이 포함돼 있다. 과도한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의 갖가지 부조리를 양산해 내는 이때 무엇보다 예술인들의 역할은 중요하다. 예술이 반딧불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술이 말을 해야 사람들의 방향성도 바뀌고, 새로운 사회도 앞당겨진다. 그것이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의 역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밖에 없다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