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개망나니의 사색

007. 바다 한가운데에서 - 진실이라는 이름

이동권 2024. 3. 4. 16:15

 

이름을 날리기 원하는 인간은 기품을 잃고 존경받지 못한다.

 

 

창가에 기대어 바다를 물끄러미 내다봤다. 바다는 세차게 너울지고, 한없이 푸르렀지만 조용했다. 낚시하는 배와 여객선이 지나가면서 생기는 포말이 아니라면 어떤 활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개망나니였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나는 피로했다. 며칠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잠시 눈을 붙였다.


여자들의 수다 소리에 잠에서 깼다. 자연스레 그 여자들에게 눈길이 갔다. 여자들은 또래로 보이지 않았다. 동네 계모임에서 온 것 같았다. 귀티가 나는 여자는 자기 큰 딸이 천재라고 자랑했다. 딸이 공부를 잘해 유명한 학교에 다니지만 성격이 좀 괴팍해 말도 쉽게 못 붙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일행들은 성격이 어떻든지 자기 아들딸도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며 연신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천재들은 여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남다른 고통을 겪었다. 반면 자신이 똑똑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가족들을 항상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재능을 보증 삼아 갖가지 난행도 저질렀다. 그럼에도 주위 사람들은 천재를 너그럽게 이해했고 다재함을 선망했다. 


친구 중에도 생각하는 차원이 또래 아이들과 달랐던 천재가 있었다. 그는 친구들이 병아리를 귀여워하며 한두 마리씩 사갈 때도 한 번 쓱 본 뒤 ‘사람이 키울 게 아니’라고 어른스럽게 얘기하곤 했다. 공부하지 않아도 1등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외로웠다.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혼자 놀기를 좋아했다.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그저 그렇고 그런 공무원이 돼 있었다. 너무도 평범해서 ‘그때 잘난 체했던 너 맞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반면 함께 어울리고 돕기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다. 머리도 똑똑하고 기백도 좋아 골목대장을 했던 아이였다. 사람들의 이해와 선망을 알고 있는 천재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 그 친구가 그런 타입이었다. 천재를 비롯해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아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교만하고 아집에 빠져 말년을 외롭게 보냈다. 그는 그렇지 않았다. 늘 곁에 사람들이 따랐고, 그와 함께 있기를 좋아했다. 겸손했기 때문이다. 그런 걸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보답하는데 주저하지 않아야 진짜 천재요, 성공한 사람이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사람도 모든 일을 잘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도움과 희생 없이는 홀로 오롯이 서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우석 박사 같은 경우도 그를 조력했던 여러 사람들이 없었다면 거짓 논문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1)


줄기세포는 단지 난치병 환자의 치료와 생명 연장을 위한 과학기술의 산물만이 아니었다.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상품이자 국력을 상징하는 매개이기도 했다. 미국이 그랬고, 소련이 그랬듯이 우수한 과학기술은 돈을 벌게 했고, 자국의 힘을 과시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은 줄기세포 연구에 매달렸다. 국가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수많은 거짓도 있었다.


진실은 존재했다. 끝없이 진실 추구를 갈망하고, 또 그것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진실은 드러나게 돼 있었다. 하지만 진실이 실재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감춰질 때였다. 그렇게 한 번 감춰진 진실은 밝혀내기 어려웠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그것을 모두가 원하지 않았다. 자신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실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국가나 조직의 이익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때는 더욱 그랬다. 거기에는 인간도, 윤리도 없었다. 


나는 사회적인 삶을 허상처럼 느꼈다.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참모습을 은폐했다. 사회적 삶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를 무의식의 세계에 주입시켰다. 그래서 사회적인 삶에 악영향을 미칠 진실은 말하지 않았고, 무의식 속에 더욱 굳게 감췄다. 어쩌면 진리라는 것도, 애초에 존재론적인 거짓 위에 서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꼭 나쁘거나 불행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사회적인 삶은 자기가 자신에게 스스로 거짓말을 할 수 있도록 면죄부를 수여받았다. 그로 인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유연해지도록 운명 지어졌다. 중요한 것은 마음 내부로의 여행을 통해 참된 영혼을 스스로 배양하면서 정의를 위해 힘을 쏟고 있느냐, 마음속에 세상을 살피려는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였다. 거기에서부터 참 마음은 출발했다. 자신이 솔직하고 거짓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착하다는 것도 무척 좋은 성품이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이타적인 마음으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성격이 좀 더럽고 거칠더라도 정의로운 사람을 좋아했다. 타인을 위해 마음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을 존경했다. 

 

 

1) 2005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황우석 서울대 수의대 교수의 논문이 조작된 것으로 알려져 전 세계에 파문이 일었다. 황우석 교수는 사람 난자에서 환자맞춤형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세계 최초로 추출했다는 사실을 논문에 실은 바 있다. 대법원은 2014년 2월 27일 황우석에게 사기 및 횡령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고, 서울대 교수직 파면도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줄기세포는 아직 분화되지 않은 세포다. 적절한 조건을 맞춰 주면 여러 종류의 신체 조직으로 분화시킬 수 있다.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손상된 조직을 재생하는 치료에 응용하기 위해 줄기세포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천적으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무엇이 인간을 변하게 했을까. 밖이 아니라 안에 원인이 있다. 환경의 영향도 있지만 이기심이 가장 크다. 이기심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기 때문에 자신마저 가차 없이 버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