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43. 장준하 일대기 30 - 해방 후 조선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이동권 2023. 9. 1. 01:01

미군정의 푸대접 - 조국의 첫 밤

임시정부는 신문기자들을 모아놓고 당면정책 14개 조항을 발표했다. 조항은 연합국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우호하고, 국제사회에 주권자로서의 발언권을 행사하며, 독립국가와 민주정부를 원칙으로 신헌장을 발표하고, 조국 독립을 방해한 자와 친일파 세력을 숙청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골자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저녁 8시가 넘어서야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에 들어갔다. 장준하는 미군이 임시정부를 대하는 태도가 적잖게 신경 쓰였다. 임시정부 요인이 국무위원이 아니라 망명투사 혹은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다는 건 그들이 원하는 것이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임시정부를 제멋대로 규정한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임시정부의 한계도 여실했다. 김구 주석은 기자들에게 육성 방송을 내보내 달라고 요구했지만 미군정의 허락 없이는 방송에도 나갈 수 없었다. 


미군정은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 분단점령이 결정될 때부터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3년 동안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정식명칭으로 삼팔선 이남지역을 통치했다. 미군정은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을 행정고문으로 두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이용해 강제력과 권위를 지닌 정부가 됐다. 정부의 각 국장은 미군 장교들이 맡았다. 


장준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푸대접하는 현실이 가슴 아팠다. 그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파랗게 잔디가 깔린 경교장 뜰 안을 잠시 거닐다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임시정부가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바로 서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다음날 일정이 많아 서둘러 잠을 청했다. 


장준하는 아침에 일어나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매만졌다. 임시정부 요인들을 찾는 방문객도 많을 것이고, 일반 국민들의 환영회도 열릴 예정이었다. 김구 주석을 수행하는 수행비서로서 헝클어진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임시정부 요인 수행원은 4명이었다. 4명 중 광복군 장교는 장준하 혼자뿐이었다. 3명은 임시정부 경호대원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8시부터 인사들이 경교장을 찾아왔다. 그 수가 너무 많아 김구 주석과, 엄항섭 선전부장, 장준하 셋이서 나눠 맡기로 했다. 원로나 중요 인사는 김구 주석과 면담하고, 간부급 인사는 엄 부장이, 신문기자나 개별적으로 인사하러 온 일반 시민은 장준하가 맡았다. 

어지러운 시국 - 혼이 왔는지 육체가 왔는지 분간할 수 없는 심정이다

장준하의 초등학교 동창인 최기일이 신문기사를 보고 경교장을 찾았다. 최기일은 이승만의 시종비서로 일했다. 그는 징병을 피해 징용을 택하고 평양 시멘트 공장에서 일했다. 해방 후 학도병거부자동맹을 조직하고 새나라 건설에 참여했지만 좌익과 부딪치면서 이승만과 인연을 맺었다. 장준하는 어릴 적 그와 함께 예배드리고 뒷산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벌거숭이로 냇가에서 멱을 감고, 푹 익힌 옥수수를 나눠 먹으며 사이좋게 지냈다. 부모님끼리도 무척 친해 사촌처럼 교류했다. 장준하는 아직 가족들을 보지 못했지만 그를 만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나마 풀 수 있었다. 


김구 주석은 신문기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자들은 민족반역자와 친일파를 제거하는 것과 조국 통일 중 무엇이 중요하냐고 물었다. 김 주석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통일이라고 밝혔다. 어렵게 해방된 마당에 한 민족이 갈라지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고단한 환국의 심정도 밝혔다. 육체와 혼이 분리돼 있는 것 같은 갈급한 상황이라며 침잠해했다. 장준하의 처지도 비슷했다. 시국이 어지러워 마음이 편칠 않았고, 머지않아 거센 시련과 도전이 눈앞에 불어 닥칠 것도 예감했다. 


해방 후 한국은 정치사회적 혼란기였다. 미군정은 좌익이 주도하는 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광복 이후 생긴 조선국군준비대를 해산했다. 대신 국방경비대를 발족하고, 정당등록법을 제정했으며, 명령계통을 단일화해 중앙집권제를 구체화했다. 또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체포령을 내렸고, 민족주의민주주의전선, 인민공화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사무소를 폐쇄했으며, 좌익계열 1,000여 명을 검거했다.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는 이합집산을 되풀이했다. 그중 대표적인 정치세력은 조선공산당-남로당 계열의 좌익, 인민당-근민당 계열의 중도좌파,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했던 중도우파, 우익진영의 한민당과 김구가 중심이었던 한독당,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국민회 계열의 이승만 등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계급과 사상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했고 민족은 갈기갈기 분열됐으며, 장준하가 꿈꾸는 정의로운 새 나라 건설은 전도요원해졌다. 그는 철저한 기독교 보수주의자였다. 김구와 마찬가지로 민족통일과 신탁통치반대를 주장했고 소련과 공산주의, 좌익 세력을 거부하는 자유민주주의자였다. 

평민의 자격? -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미군정은 김구 주석의 육성방송을 허락했다. 시간은 2분 내외였다. 김구 주석은 엄항섭 선전부장과 장준하를 불러 연설문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 논의한 뒤 장준하에게 원고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방송 시작이 1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장준하는 2분 동안 어떤 얘기를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조국에서 동포들에게 2분밖에 얘기할 수 없는 것도 이해가 안 됐지만 미군정에서 연설문에 ‘평민의 자격’이라는 구절을 꼭 넣으라는 지시가 있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이 왜 개인적인 것인지 서글프기만 했다. 그는 5분 만에 연설문을 완성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들어온 사실을 알리는 내용 그뿐이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강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무르다가 23일 상해를 떠나 당일 경성에 도착되었습니다. 나와 나의 각원 이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하여 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동포가 하나로 되어 우리의 국가 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앞으로 여러분과 접촉할 기회도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겠기에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료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KBS 영상실록)

김구 주석은 연설을 마치고 경교장에 돌아와 장준하에게 “장목사 수고했소.”라고 말했다. 김 주석은 장준하가 일본 신학교에 다니다 징병을 당한 것을 알고 꼭 장목사라고 불렀다. 


장준하는 한국에 들어와 첫 번째 일요일을 맞았다. 김구 주석과 함께 감리교 정동교회를 찾아 아침 예배를 드렸다. 다음날부터는 임시정부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됐다. 장준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조국 건설의 앞날에 영광이 깃들기를, 가족들에게도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기를, 개인적으로는 호된 시련과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밀고 나가면서 삶의 균형을 똑바로 잡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너무도 다른 사람들 - 아침햇살을 받으며

김구 주석의 일정은 빡빡했다. 김 주석을 보좌하는 장준하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국내 여러 정당과 단체 관계자, 미군정 핵심 참모, 이승만 박사 등과의 미팅도 마련됐고, 거물급 정치인 4명과 연속 회담도 잡혔다. 4명은 한국민주당 송진우 당수, 국민당 안재홍 당수, 조선인민당 여운형 당수, 조선인민공화국 허헌 국무총리였다. 장준하는 그 자리에 입회해 회담 내용을 기록할 예정이었다. 그는 중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지만 걱정도 됐다. 각자 이데올로기도, 노선도, 세계관도 달랐다.


장준하는 4명의 동향을 파악한 보고서를 올리고 한 시간 동안 브리핑했다. 김구는 먼동 햇살이 쏟아지는 집무실에 앉아 장준하의 보고서를 살피면서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끝까지 경청했다.  


한국민주당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주의 보수 정당이었다. 초기에는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법통을 옹호했지만 이승만 박사가 단정을 주장하고, 임시정부가 단정을 반대하자 이승만을 지지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한민당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중추적 역할을 했지만 이승만과의 정치적 갈등이 많아 스스로 야당이 됐다.


국민당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점차 좌경화되자 불만을 품고 부위원장직을 사퇴한 안재홍이 조선국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자유당, 민중공화당, 근우동맹, 협찬동지회 등의 군소 정당을 흡수해 국민당으로 개칭했다. 국민당은 임시정부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조선인민당은 여운형이 중심이 돼 결성한 중도좌파 정당이었다. 신탁통치안을 결정한 조선공산당과 입장을 같이 했지만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해 공산당과 보수 정당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조선인민당의 일부는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과 함께 통합해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했고, 여운형은 좌파 세력을 다시 규합해 사회노동당을 조직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소집해 선포한 사회주의 좌파 정부였다. 중앙인민위원회의 인적 구성은 대부분 공산주의자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박헌영 계의 재건파공산당이 많았다. 이들은 친일파와 친일 잔재를 완전히 척결하고 외세, 반민주주의, 반동적 세력과 철저한 투쟁을 통해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게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