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부재와 일제의 과잉 - 수수 이삭의 몸부림
장준하는 하루 일정을 마친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한미호텔로 향했다. 호텔 앞 화단에 심어놓은 소나무들은 계절을 잊고 날카로운 바늘잎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노목 가지에 앉은 까마귀는 외로웠는지 인기척을 느끼고 서럽게 까악까악 울어댔다.
그는 집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독방을 썼다. 그것도 민가의 허름한 이부자리가 아니라 서울에서 이름 꽤나 있는 호텔방이었다. 장준하는 숙소에 들어오자 피곤한 몸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허리띠조차 풀지 않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 천장과 마주했다.
2년 넘게 50여 명과 합숙하며 칼잠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일제가 일으킨 전장에 끌려간 비분을 억누르며, 조국의 부재와 일제의 과잉에 짓눌린 채 하루하루 잠을 청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매달려 왔다. 힘이 없는 나라에 민중은 없었다.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예 잊었다. 그러나 가장 격렬하고 비극적인 역사는 부재가 아니라 과잉에서 나왔다. 한국 민중의 부재도 역시 일본 군국주의의 과잉에서 비롯됐다. 일부의 부재는 모른 척하며 적당히 넘어갈 수 있지만 전체가 통째로 부재하면 얘기는 달라졌다. 부재가 곧 불필요로 정의됐다. 일제에게도 한국 민중은 부재했고, 인간으로 대접할 이유가 없었다. 피정복자는 정복자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에 불구했다.
장준하는 지쳤다. 한국에 돌아와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서 웃음도 많이 잃었다. 명망가들의 모사와 이기(利己)에 삿대질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흉흉한 시국을 관전하는 심정은 개운치 못했다.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처럼 분노도 겹겹이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저의마저 의심할 정도로 깊은 불신에 휩싸였다. 그에게는 잠이 필요했다. 잠시 생각을 멈출 시간이 절실했다. 운명은 내부에 있었다. 외부에서 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중심을 잃지 않고 밀고 나가면 피 말리는 고통도 이겨 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환각에 시달렸다. 흉악한 꿈에 가위눌려 다리가 제대로 놀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런수런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수수 이삭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밤새 내내 수수밭을 뒹굴며 알 수 없는 적에 내쫓겼다. 수수 잎이 바람에 넘실거리는 밭고랑을 허리를 숙인 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내달렸다.
마음속에 깃든 환한 일광 - 덕수궁 담길 따라
첫 국무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경교장에 김구 주석을 비롯해 이승만 박사 등 요인들과 보도진이 경교장으로 들이닥쳤다. 임시정부 2진 요인들의 귀국이 그나마 늦어져 어지러운 시국이 교통정리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 임시정부 안에서 누가 먼저 한국에 들어갈 것이냐를 두고 터져 나왔던 불만이 또다시 국무회의에서 고개를 들었다.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상황이었다. 조국에는 갖가지 풀어야 할 문제들이 산적했다. 그런 상황에서 요인들이 내뱉을 불평은 아니었다.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을 버려야 했다. 공포스럽고, 잔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과정에 치달아도 상대방을 먼저 존중하면 언젠가는 더 나은 결말을 낳았다. 사람들은 더 나은 결말을 찾아가기 위해 타인과 관계를 맺었다. 이것이 여러 가지 고민과 괴로움을 잉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서로 배려하고 의지하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었다. 결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였고, 여러 가지 문제들도 서로 부딪쳐야 정답이 나왔다. 그러나 국무위원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결별을 선택하려고 했다. 자신의 생각과 잣대로 테두리를 그어 놓고 그 선을 넘어가지도, 넘어오지도 못하게 마음을 돌렸다. 바라는 마음 없이 먼저 헌신하고 희생하면 모든 상황은 역전됐다.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서로 믿고 도우면 무엇이든 만들어 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군정이나 특정한 정치세력에 의해 조국은 희생자가 될 게 뻔했다.
장준하는 회의를 품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3개월 만에 의욕을 잃고 실의에 빠졌다. 그는 국무회의 참여를 고사하고 경교장을 빠져나와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신념을 위해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일다운 일을 하고 싶었다. 그의 귓가에 돌담길을 걷는 연인들의 따뜻한 음성이 들렸다.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순수한 사랑,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벅찬 의로움이 가슴속을 내리쳤다. 그는 정동 골목 모퉁이를 돌아 대한문에 들어섰다.
거대한 나무 기둥이 치받들어 올린 추녀가 아름다웠다. 추녀 끝에는 자잘한 고드름이 하얗게 매달렸고, 처마 물이 고이는 자리에는 누렇게 익은 잡초들이 설핏하게 말라붙었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며 대한문 광장으로 오후의 햇살을 불러들였다. 장준하의 마음에도 환한 일광이 깃들기 시작했다.
더더욱 강한 열정과 투지 - 충칭으로의 길
장준하는 광복군 출신 동지들이 마련한 환영회에 초청을 받았다. 장소는 명월관이었다. 명월관은 1903년 개업해 1948년 폐업될 때까지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요정이었다. 조선 최고의 궁중요리와 문예에 뛰어난 미모의 기생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고 왕족, 귀족, 친일파 정치인, 언론인, 예술인 등 다양한 부류의 유력인사들과 돈 많은 땅 부자, 상공인들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기생들은 술을 비우기 무섭게 안주를 입에 넣었다. 동지들은 흥에 겨워 기생들에게 돈을 던졌다. 숨 쉴 틈도 없이 가무가 펼쳐졌고, 난잡한 농담이 이어졌다. 장준하는 크게 실망했다. 고급 요리와 호화스러운 잔치였지만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동지들이 대륙의 험난한 6천 리 행군, 충칭으로의 길을 다 잊은 듯했다. 고상한 척, 청렴한 척한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기 싫어, 차마 동지들을 물리치고 빠져나올 수 없어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임시정부 2진 요인들의 환영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장준하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참여를 독촉했지만 경교장을 지키겠다고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는 허무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삶만큼 허무한 것도 없지만 일제에게 짓밟힌 조국을 찾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나섰던 애국지사의 고절이 국무위원들에게서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국무위원들은 세를 키우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외부 파벌과 결탁해 반대 세력과 싸우기 바빴다. 저마다 제 주장을 펼치며 정국을 주도하려는 것에만 집중했다.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한국이 미군정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한결같았다. 한국 민중의 삶과 조국의 번영과는 너무 동떨어진 행보였다.
장준하는 이승만 박사와 함께 일하는 고향 친구 최기일을 만났다. 김구 주석과 이승만 박사의 만남을 주선해 두 사람이 정국을 둘러싸고 펼쳐진 산적한 문제를 쾌도난마로 해결하길 바랐다. 분열된 국론을 모아 하루속히 조국을 본궤도에 올려놓고 도탄에 빠진 민생에 힘을 쏟길 원했다. 그 길이라면 스스로 기운을 내 다시 한번 더더욱 강한 열정과 각오, 투지로 일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낭패감에 젖거나 낙담에 빠질 때마다 살길을 모색해 줬던 <등불>과 <제단> 같은 잡지도 만들고 싶었다.
친일파 암살 배후 - 백범 선생의 죽음
1947년 장준하는 경교장을 나와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가입했다. 이 장군은 오랜 광복군 생활과 망명 생활의 경험에 기초해 청년단을 운영했다. 족청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며 급속히 성장해 자유당 정권에 깊숙이 개입했다. 장준하는 독립군 대장 시절 강건한 모습과는 딴판인 그에게 실망하고 족청에서 발을 뺐다. 이 장군도 정파 싸움에 여념 없었던 위정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듬해 김구 주석은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려는 국제연합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을 제창했으나 실패한 뒤 정부수립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당선되자마자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임시정부를 말살했고, 반대파를 제거했으며,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했다. 그는 만주와 중국에서 벌어진 무장항일운동에 무지한 데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민중의 저항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 오로지 친미와 분열, 반민주로 일관했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경 안두희 육군 소위가 경교장에서 김구 주석에게 4발의 총탄을 쐈다. 김구는 그 자리에서 순국했고, 안두희는 살해를 지시한 사람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으로 우익활동에 전념했다.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았지만 단독범행으로 처리돼 안두희의 종신형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그는 석 달 후 15년으로 감형이 됐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했으며, 이후에 대위로 전역했다. 1953년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완전 복권됐다.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경영하며 안락한 생활을 누렸지만 4.19혁명 이후 김구선생살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잠적했다. 도주 생활 중 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났고, 곽태영 백범 독서회장으로부터 목에 자상을 입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1987년 권중희 민족정기 구현회장에게 발각돼서는 몽둥이세례는 물론 암살 배후에 대해 자백하고, 김구 주석의 묘소를 강제 참배하기도 했다. 그때 김구 암살 배후로 지목된 사람은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은 악랄한 친일파였으며, 이승만의 양자 혹은 오른팔로 불렸다. 그는 1956년 41세의 나이에 이미 부하에게 역사적인 심판을 받았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자택에서 박기서에게 피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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