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국주의의 침몰 - 한국의 한 아들로
1945년 8월 10일 OSS훈련을 지휘하는 도너번 소장이 제2지대를 방문했다. 장준하는 드디어 한국침투공작에 투입될 때가 왔다고 직감했다. 그는 대원들과 함께 통신장비를 비롯해 식량과 무기를 챙겼다.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신분증과 일본 국민복, 신발 같은 것도 별도로 준비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도 출동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너번 소장을 비롯해 김구 주석과 이범석 장군 등 미군과 광복군 간부들이 모여 앉아 심각하게 회의만 진행할 뿐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전통은 오지 않았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OSS대원들에게 명령이 당도했다. 하달된 내용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연합국에 통보했다는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 총리 처칠, 중국 총통 장제스는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에서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일본에 항복을 권고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에 대한 후속조치를 어떻게 취할 것인지 표명했다. 8월에 열린 회담에는 대일 선전포고를 했던 소련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참여해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들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인류와 일본 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포츠담선언 즉각 수락을 요구했다. 또 선언에는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일본이 지배한 식민지에서 무조건 철수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면 한국의 독립도 보장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선언을 거부하며 마지막 발악을 했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또 소련까지 전쟁에 참전해 밀고 내려오자 일본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제2지대는 발칵 뒤집혔다. 처음에는 죽기를 각오한 마당에 일본이 항복하자 어리둥절했지만 곧바로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며 광복의 기쁨을 나눴다. 곳곳에서 큰소리로 애국가를 부르고 울음을 터뜨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장준하는 조국 해방의 선봉에 서서 용감무쌍하게 전적을 올리는 기회가 사라져 서운했지만 일본의 항복은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곧 있으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고 대한의 아들들이 조국땅을 밟을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김준엽을 끌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두 볼을 타고 줄줄이 흘러내려 김준엽의 어깨를 적셨다. 김준엽도 장준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글썽이며 광복의 기쁨을 누렸다.
해방을 목전에 두고 - 준비하라, 진입한다
제2지대 분위기는 한국이 곧 해방이 된다는 기대감 때문에 순식간에 바뀌었다. 삼삼오오 모여 조국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소리도 이곳저곳에서 메아리쳤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군사훈련과 한국침투공작도 중단됐다. 일본이 시간을 벌기 위해 간교하고 음험한 속임수를 쓰지 않으면 전쟁이 끝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조례 분위기도 달라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례에 참가한 대원들의 표정에서는 비장한 각오가 불타올랐다. 엄숙하고 강경한 태도로 애국가를 제창했고, 끝장을 보려는 마음으로 구호를 외쳤다. 일본이 항복하자 목소리는 여전히 씩씩하고 우렁찼지만 표정만은 생기발랄했다. 걸음걸이엔 자신감이 넘쳤고, 청춘의 아름다움도 철철 흘러넘쳤다. 조례에 묵념의 시간이 마련됐다. 대원들은 광복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동지들의 넋을 기렸다.
이범석 장군은 격변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측하고 서둘러 국내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가 이 장군에게 한국 정진군 총사령관 직책을 맡기고 광복 이후 전개될 불편한 상황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길 요청했다.
장준하는 흠칫 놀랐다. 민족의 해방을 목전에 두고 조국을 위해 꼭 필요한 당면 과제들을 해결하고 싶은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시기상조였다. 일본군이 한국 땅에서 물러난 것도, 정식으로 항복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예상할 수도 없었다. 조국의 독립이 진정한 해방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일본으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예속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야 했다. 일본군이 노린 교활한 함정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장군은 이미 미군사절단과 얘기를 끝마친 뒤였다.
장준하는 이범석 장군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근심을 접었다. 이 정도의 일로 불안에 떨 필요는 없었다. 그는 한국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들을 이범석 장군과 상의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우선은 일본군과 무기를 접수해 철저하게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었고, 그다음은 친일파들을 적출하고 식민지 잔재를 청산해 영광된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불량한 정치세력들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하고, 전국의 치안 유지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무전 - 회항, 진입중지 명령
1945년 8월 13일 장준하는 이범석 장군과 함께 미군용트럭을 타고 시안비행장으로 향했다. 트럭은 흙먼지를 날리며 속도를 내더니 울퉁불퉁한 자갈길에 들어서면서 심하게 털썩거렸다.
장준하의 얼굴은 좌우로 흔들리며 잔뜩 굳었다. 조국 강산을 다시 밟는 흥분과 일본군의 느닷없는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초조감이 엇갈아가며 그를 괴롭혔다. 한국침투공작을 결심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줄다리기했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을 펴고 심호흡했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됐다.
시안비행장 상공에 붉은 노을이 번지더니 천지가 금세 어둑해졌다. 더운 열기를 식히는 바람소리만 귀에 쟁쟁할 뿐 수송기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준하 일행이 비행장 대합실에 앉아 하릴없이 수송기를 기다린 지 8시간이 넘었다. 비행장 진입로 쪽에서 떠오른 달이 어느새 반대편 하늘에서 반짝였다. 장준하는 조국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려는 마음으로 무료한 대기시간을 견뎠다.
미군 수송기는 다음날 새벽 4시가 넘어서야 활주로를 서서히 미끄러지며 나타났다. 이범석 장군,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이계현, 이해평을 포함한 미군사절단 28명이 수송기에 올랐다. 수송기는 날카로운 굉음을 내며 하늘로 떠올랐다. 장준하는 수송기가 이륙하자마자 눈을 감고 잠시 잠에 빠졌다. 엔진소리도 시끄럽고 조국 땅을 밟는 것도 흥분됐다. 일본군의 반응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행장 대합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 졸음이 밀려왔다.
비행기 동체에 아침 햇살이 부딪쳤다. 두어 시간을 날은 듯싶었다. 장준하는 잠에서 깨 일출이 시작되는 가경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해방의 기쁨을 북돋아 줄 태양이 고국산천에 떠오르는 장관을 상상했다. 그러자 조국이 바로 발밑에 있는 것 같아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그는 수송기에서 내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걸어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조국을 되찾은 희열에 젖은 나머지 다리가 후들거려 발을 떼어놓지 못할 것 같았다.
수송기 기장이 미군 본대로부터 온 무전 교신 내용을 이범석 장군에게 전했다. 무전 내용은 미군사절단 한국진입중지였다.
이범석 장군의 손수건 - 조국의 바다, 서해
한국으로 진입하던 수송기가 기수를 갑자기 틀었다. 도쿄로 진입하던 미국항공모함이 일복특공대의 습격을 받아서였다. 장준하 일행은 몸의 기운이 쏙 빠지면서 정신이 멍했다. 한차례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어색한 침묵에 빠졌다. 조국의 산하에 발을 디디는 간절한 바람이 일순간에 꺾였기 때문이었다. 이범석 장군도 시험에 낙방한 수험생처럼 허탈한 눈빛으로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군국주의의 꿈꾸는 일본군에 대한 실망보다는 꿈에도 잊지 못할 조국에 들어갈 수 없는 절망이 더욱 컸다.
일본은 마땅히 패망을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에 놓였다. 그러나 한국의 운명도 그리 간단치 않았다. 소련은 며칠 전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남하를 시작했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이 가까워지자 소련에게 만주 일대의 일본군을 격퇴하면 러일전쟁 당시 빼앗겼던 권리를 모두 회복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련은 미국의 조건을 수락하고 일본과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장준하는 소련이 남하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해방되면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것 같아 우려했다. 어떻게든 한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우고 싶은 개인적인 여망 때문이었다.
8월 15일 미군사절단은 장준하 일행에게 다시 대기명령을 내렸다. 언제 출발할지 알 수 없지만 조만간 한국으로 떠날 것은 확실했다. 장준하는 또다시 꿈에 부풀었다. 잠도 오지 않았고 밥도 잘 먹지 못했다. 조국에 가고 싶은 생각만 은근이 애를 태웠다. 특히 어머니가 가마솥에 보글보글 끓여 주던 된장우거짓국과 시원한 동치미가 생각나 미칠 지경이었다.
사흘 후 새벽 이범석 장군,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4명이 무기와 탄약만 지참하고 수송기에 올랐다. 인원을 줄이고, 개인 휴대품을 소지하지 말하는 미군의 요청이 있었다.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 수송기를 가볍게 하려는 의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미군사절단의 도움을 받는 이상 거절할 수 없는 청이었다.
이범석 장군은 수송기 창밖으로 인천 앞바다가 보이자 감회에 젖어 눈물범벅이 된 눈을 손수건으로 찍어냈다. 장군의 손수건에는 ‘지금까지 구차하게 목숨을 유지한 이유는 조국에 보답하기 위해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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