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질서와 폐단 - 광복군 모자 한 개
8월 24일 미국사절단에게 새로운 지시가 하달됐다. 한국 입국을 취소하고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 장준하는 낙담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들어가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미군의 지휘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건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미약하나마 조력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수송기에 올랐다.
이범석 장군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시안에 돌아온 즉시 미군 웨드마이어 장군을 만났다. 국제 정세가 돌아가는 것과 관계없이 한국에 들어가 해방 후 찾아올지 모를 극심한 사회혼란과 무질서를 안정화시키겠다고 고집했다. 웨드마이어 장군은 요지부동의 자세로 버티는 이 장군의 뚝심에 밀려 결국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이 장군은 일행 일곱 명을 뽑았다. 장준하도 일곱 명 안에 뽑혀 세 번째 한국행 여정에 올랐다. 이 장군은 미군과 조율할 일이 많아 이번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장준하 일행은 미군 7함대와 함께 한국에 들어가기 위해 상해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상해는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연일 축제분위기였다. 10여 년간의 전쟁으로 위축됐던 도시가 단박에 활기찼던 옛 거리의 풍경으로 회복됐다. 장준하도 며칠 동안 해방의 기쁨에 도취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일본군에서 탈출했던 한성수가 첩보활동 도중 처형됐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울적해졌다. 머리를 떨구고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일본의 앞잡이였던 교포의 간계에 걸려들어 체포되고 말았다. 장준하는 국내 상황이 안정되면 친일파 단죄부터 서둘러야겠다고 다짐했다.
장준하 일행은 동포 사회에서 번진 무질서를 해결하기 위해 상해에서 불철주야 뛰었다. 일본이 항복하면서 생긴 폐단과 어지러운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힘을 모았다. 상해에는 광복군 행세를 하며 사기행각을 벌이는 무리들이 등장해 골칫거리였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까지 동포들을 괴롭히거나 범죄를 저질렀던 이들이 광복군 모자를 얻어 쓰고 망명가나 독립운동가인 양 행동하면서 친일파 동포들의 재산을 몰수하려고 난립했다.
1, 2, 3 지대 광복군들도 서로 암투했다.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중상모략을 일삼았고, 일본군이 해산되면서 갈 곳을 잃은 한국인 장교들을 먼저 데려가려고 혈안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 상하이 홍커우공원
미군 7함대 입성이 계속해서 늦어졌다. 어쩌면 배편을 이용한 귀국은 어려워 보였다. 미군은 제2지대 광복군을 돕기 위해 시간을 투자할 만큼 사려 깊지 않았다. 장준하는 중앙군관학교에서 보냈던 3개월처럼 상해에서도 허송세월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이범석 장군의 연락을 기다리며 마음의 중심을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가슴 위에 바윗덩이를 올려놓은 것 같았다. 뜻밖의 희소식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정에게서 왔다. 상해에 비행기를 보내 임시정부 요인들을 국내로 데려가겠다는 기별이었다.
김구 주석과 요인들이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는 처음으로 임시정부가 조직된 곳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 창사, 광저우 등을 전전하다 1940년 충칭에 자리를 잡았다.
홍커우공원에서 김구 주석 방문을 환영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날 환영식에는 수천 명의 교포가 참여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교포들은 김구 주석이 연단에 오르자 만세를 외치며 눈물을 흘렀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연호했다. 장준하 일행도 교포들의 만세 소리를 들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신이 나서 만세를 외치며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장준하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김구 주석의 모습을 지켜봤다. 연단에 오른 김 주석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연신 눈물을 쏟아냈다. 숨을 모아 쉬며 더듬더듬 얘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입이 마르며 목이 막히고, 눈물이 자꾸 흘러내려 말을 잇지 못했다.
김구의 눈물은 조국 독립의 기쁨에 넘쳐 터져 나오는 눈물이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설움에 겨워 흘리는 눈물이었다. 의기충천했던 독립투사들의 죽음에 대한 위로이기도 했고, 능라를 펼쳐 놓은 것처럼 장대했던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상해는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웠던 김구의 30년 세월이 모두 응집된 곳이었다. 초대 임시정부에서 일하던 젊은 김구의 패기와 뚝심이 실험받던 곳이었고, 일제가 김구 암살을 시도할 때 희생됐던 아내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었다. 또 지도자를 잃은 국민이 의지하고, 나라 잃은 동포들이 새 삶을 살도록 땅을 내준 제2의 고향이었다. 특히 홍커우공원은 자신의 지시를 받고 윤봉길이 폭탄을 던진 장소이기도 했다.
텅 빈 김포 활주로 - 김포의 하오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강물에 햇볕이 닿자 물비늘이 번쩍였고, 고깃배는 찰싸닥거리며 바다로 향했다.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장준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두 번이나 비행기를 회항해 돌아오는 날도 신기할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예감과 현실은 전혀 달랐다.
김구 주석은 상해에서 18일을 머문 뒤 1945년 11월 23일 미군정이 보낸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장준하는 김구 주석의 비서 자격으로 기회를 얻었다. 그의 마음속은 복잡했다. 설렘과 기대도 있었지만 초조한 기색도 역력했다. 하나는 분명했다. 조국에 확고부동한 자신의 신념과 긍지를 심을 날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굳건한 의지와 열정으로 식민지 조국에 산적했던 불행의 흔적들을 지워나가고, 현실적인 여건이 어떻든 간에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가치를 실현할 때가 왔다.
장준하 일행은 자리에 앉아 오랜 묵상에 잠겼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도는지 대화를 청하는 사람은 없었다. 장준하는 부모, 형제, 아내 생각이 간절했다. 모두들 건강하게 잘 있는지, 한국에 들어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을지 물음표를 던졌다. 서울에 도착하면 분주한 일상이 기다렸다. 고향 의주를 방문하기는 쉽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일이 하루속히 정리돼야 가능했다. 그는 일단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바쁜 마음은 달랬다.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 안이라고 알렸다.
비행기는 3시간을 달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차디찬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늦가을 오후였다. 장준하 일행은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애국가를 제창했다.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웠던 애국지사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장렬하게 노래했다.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자유로운 새 나라 건설을 위해 일제 식민지 36년의 세월을 뛰어넘자는 결의이기도 했다.
비행장은 조용했다. 찬바람에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쓸쓸하게 인사를 건넸다. 환호성을 지르는 동포도, 환호성도, 태극기도 없었다. 장준하 일행을 마중 나온 것은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명령을 받은 미군뿐이었다. 장준하는 서글펐다. 나라다운 나라를 건설하는 막중한 역할을 떠맡을 임시정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에 그저 한숨만 나왔다. 긴긴밤을 지새우며 귀국을 서두르라 안간힘을 쓰며 애를 태웠던 나날들이 무색했다.
몰려드는 사람들 - 경교장 도착
장갑차 여러 대가 김포공항에 대기 중이었다. 미군은 장준하 일행을 장갑차에 나눠 태우고 서울로 향했다. 장갑차는 사방이 가로막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됐다. 장준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기로 했다. 임시정부의 은밀한 귀국은 나중에 모두 밝혀질 일이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국무위원이 아니라 개인 자격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이 같은 비밀작전을 펼쳤다.
창밖으로 소를 앞세우고 걷는 농부가 보였다. 들판에는 짚으로 가마니를 짜는 아낙네도 보였고, 겨우살이 땔감을 지게에 짊어지고 마을 안으로 사라지는 청년도 눈에 띄었다. 벼농사가 끝나고 월동준비가 한창이었다. 조국을 떠나기 전 봤던 그때 그대로의 농한기 정경이었다. 장준하는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농부에게 인사를 청했다. 하지만 미군은 개인행동이나 국민과의 접촉을 하지 못하도록 엄중 경고했다.
장갑차가 한강철교를 지나 용산에 이르자 포고문과 격문이 벽에 덕지덕지 겹쳐 붙어 있었다. 해방 후 격변기를 맞은 한국사회를 엿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미군정은 한국을 쥐락펴락했고, 좌우는 대립했으며, 정당과 단체는 난립해 첨예하게 부딪쳤다.
장갑차는 서울역을 지나 서대문 경교장에 도착했다.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가 마련한 숙소였다. 경교장만으로는 숙소가 부족해 인근 한미호텔과 신도호텔에도 따로 숙소를 준비했다.
경교장 주인은 일본 식민지 시절 금광을 개발해 부자가 됐고,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로 활동하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도왔다. 해방 후 임시정부가 들어오자 그는 얼굴색을 바꿨다. 자신의 친일 행적을 참회하는 의미로 경교장을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에 기증했다. 경교장의 원래 이름은 ‘죽첨정’이었다. 김구는 죽첨정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인근 개울의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바꾸었다.
경교장에도 임시정부 요인들을 기다리는 사람도, 태극기도 없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가 곧 입국할 거라는 소식만 알렸지 정확한 시간과 도착장소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임시정부 일행 15명이 귀국한 사실은 미군정 공보과가 국내 언론사 기자들에게 전파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졌다. 김구 주석의 입국 소식을 전해 들은 기자들과 환영인사들이 경교장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김구 주석은 여장을 풀 여유도 없이 사람들을 맞았다. 이승만 박사도 직접 경교장을 찾아 김구 주석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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