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38. 장준하 일대기 25 - 한국침투공작을 결심하다

이동권 2023. 9. 1. 00:38

광복군 제2지대 - 동북 방향으로

장준하 일행은 임시정부에 도착한 지 석 달 만에 충칭을 떠났다. 죽음을 무릅쓰고 임시정부를 향해 걸었던 시간과 충칭에서 보낸 3개월의 시간이 교차하면서 일행의 얼굴에는 만감이 서렸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충칭으로 오려했는지 난감한 빛이 역력했지만 이제는 조국 독립을 위해 전쟁터에 나갈 수 있다는 기대로 마음만은 밝았다. 그러나 중앙군관학교 동지들과 뜻하지 않은 석별의 시간이 기다렸다. 일행 중 30여 명은 한미합동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시안으로 향했지만 10여 명은 남아 임시정부 경위대에서 일하기로 했다. 또 예닐곱 명은 사람에 대한 불신과 조직에 대한 회의감이 심해 일단 충칭에 남아 다음 경로를 모색하기로 했다.


장준하는 김구와 착잡한 심정으로 인사를 나누고 이범석 장군을 따라 대기 중이던 미군용 트럭에 몸을 실었다. 트럭은 뿌연 먼지를 날리며 도심과 멀지 않은 허허벌판에 세워진 충칭비행장으로 향했다. 비행장은 미군의 군수품 수송을 담당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일본군 폭격기가 자주 나타나 폭탄세례를 퍼붓곤 했다. 일행은 육중한 비행기에 몸을 싣고 세 시간을 날아 시안비행장에 도착했다. 비행장에는 훈훈한 봄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일행의 기대도 봄바람을 따라 한껏 부풀었다. 일행은 시안비행장에서 다시 미군용 트럭을 타고 두취로 떠났다. 두취는 180여 명의 광복군이 주둔한 제2지대가 있었다. 


한국광복군은 창설 초기 4개 지대로 운영됐으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3개 지대로 재편됐다. 제1지대는 김원봉, 제2지대는 이범석, 제3지대는 김학규가 이끌었다. 광복군은 중국군에 예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길 원했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로 조직을 운영하기 어려워 중국군이 제시한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받아들였다. 군비, 재정, 훈련, 작전에 대해 중국의 원조를 받는 대신 중국군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조건이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자유로운 작전권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군사위원회와 담판을 짓고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취소시켰으며, 1945년 5월에는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을 체결하면서 중국군과 동맹 관계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했다. 


장준하 일행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2지대 동지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반겼다. 이들은 트럭에서 내리는 일행의 손을 잡으며 두터운 동지애를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잡지 <제단> 발간 - OSS훈련

장준하 일행은 미군 군복으로 탈의했다. 미국인과 체형이 달라 소매와 바지 기장이 길었고, 품도 매우 넉넉했다. 미군은 간이침대와 두터운 미제 모포도 지급했다. 모포는 푹신하고 부드러워 살갗에 찰싹 달라붙었다. 일행은 OSS(미국 전략정보국,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대원이 되기 위해 3개월 동안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미국은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이 컸다. 임시정부는 내부의 분파주의가 심했고, 대중적 기반이 약했다. 해방 후 임시정부가 한국을 이끌 능력도 부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OSS를 동원해 광복군을 따로 훈련시켜 미군의 한반도상륙작전에 투입할 계획을 짰다. 장준하는 1945년 5월에 제1기 훈련원으로 들어가 그해 8월 4일 졸업했다. OSS는 훗날 미국 CIA로 바뀌었다. 


지휘관은 미국인 도너번 소장이었다. 그는 일주일 예비훈련을 거치는 동안 개개인의 성향과 운동능력, 적성, 지능 등을 판별했다. 훈련병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는 작업은 은밀하게 추진됐다. 예를 들면 점심 식사를 할 때 인근에 화약을 폭발시켜 누가 놀라고, 놀라는 정도가 어떠한지 실험을 진행했다. 대원들은 훈련을 받는 동안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예비훈련이 끝난 뒤에는 정규훈련에 들어갔다. 미군 특수부대가 받는 훈련 그대로 유격, 낙하, 극기, 무술, 경계, 야영 같은 전투훈련을 받았고 정보, 교란, 무전 같은 특수훈련도 습득했다. 매일매일 고된 훈련과 작전기술을 쌓는 교육이 진행됐다. 중앙군관학교에서 받는 훈련과는 강도나 내용면에서 완전히 달랐다.


장준하는 항상 실전과 같은 자세로 훈련에 임했다.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긴장을 놓지 않았다. 일제를 괴멸시키고 조국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허투루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훈련을 받는 시간을 쪼개 <제단>이라는 잡지를 내놓았다. <제단>은 조국이라는 제사상에 청춘을 바친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었다. <등불>을 발행한 경험은 <제단>을 내는데 크게 도움이 됐다. 과거보다 수준도 높았고, 제본 속도도 빨랐다. 특히 내용면에서 충실했다. 2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 읽을거리도 다양했다. 그는 <제단>을 300부 발행해 제2지대 동지들에게 돌렸고, 충칭 임시정부까지 우편으로 발송해 큰 호응을 얻었다. 장준하는 <제단>을 제작하기 위해 회의실이나 식당 같은 장소를 빌리지 않았다. 중화기독청년회의 간사로 일하던 팬즈 박사의 도움으로 별도의 <제단> 편집위원회 공간을 마련했다.

목욕탕에서의 설득 - 팬즈 박사와 이중첩자

장준하는 예비훈련을 마치고 일주일 평가 기간 동안 쉬고 있을 때 이범석 장군에게 특별한 임무를 받았다. 시안에 거주하는 교포가 한국 독립운동에 지급될 예정인 복리기금을 가로채려고 하니 알아보라는 지시였다. 장준하는 교포가 첩자일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조선 독립을 위해 쓰일 자금을 가로채는 건 암약하는 적군의 협력자가 아니라면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장준하는 <제단> 잡지 취재를 빌미 삼아 시안을 돌아다니며 교포의 정체를 파악했다. 생각했던 대로 교포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품행이 불량했고, 위선을 뒤집어쓰고 다녔으며, 돈에 대한 애착이 심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줄을 대는 인물이었다. 일본인과 내통하는 소문이 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장준하는 그가 시안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팬즈 박사와 어떻게 접촉했는지에 대해 일일이 확인한 뒤 그가 일본과 내통하는 친일 앞잡이라고 확신했다. 정확한 물증이 없어서 잡아 족치진 못했지만 패망해 가는 일본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범석 장군은 장준하에게 정보보고를 받은 뒤 팬즈 박사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복리기금을 광복군 쪽으로 끌어오도록 설득을 해보라는 지시도 함께 떨어졌다. 


팬즈 박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특별한 교감이 필요했다. 장준하는 처음 만난 남자들끼리 쉽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일까 생각하다 목욕탕을 떠올렸다. 상대방에게 발가벗은 몸을 보여주었으니 더 이상 숨길 게 없다는 심리적 친근감이 관계를 푸는 핵심이었다. 


장준하는 팬즈 박사와 시안의 고급목욕탕을 찾았다. 두 사람은 알몸으로 4시간 동안 목욕하고 과일을 먹고, 다시 목욕하고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눴다. 장준하는 가정환경에서부터 일본에서의 유학, 자신의 신앙심, 일본군에서 탈출해 임시정부로 가는 과정, 시안에서 받고 있는 OSS훈련 과정까지 숨김없이 털어놓으며 광복군 제2지대에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온탕에 같이 앉아 세상 편해하는 표정도, 냉탕과 증기탕을 오가며 덜렁거리는 모습도, 심각하게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는 마음도 내비치며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전했다. 팬즈 박사는 천진난만하고 소탈하며 성심이 깨끗한 장준하를 신임했다. 그와 같은 청년을 돕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고 싶었다. 팬즈 박사는 장준하에게 제2지대 광복군에게 복리기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피값 요구하는 한국침투공작 - 나는 나의 결심을 재고 있다

팬즈 박사는 장준하와의 약속을 지켰다. 며칠 뒤 제2지대 광복군에 복리기금이 도착했다. 이범석 장군은 크게 기뻐하며 장준하를 달리 봤다. 이 장군은 복리기금으로 군인들 숙소로 쓰던 허름한 절간을 개조했다. 또 예배당과 오락실, 휴게실 등도 설치해 광복군뿐만 아니라 외부 손님들과의 모임장소로 이용하도록 했다. 숙소 한편에는 <제단> 편집실도 마련해 장준하의 잡지 발행을 도왔다. 


이범석 장군 전속부관으로 활동하던 김준엽이 급하게 장준하를 찾았다. 김준엽은 이 장군의 여비서와 사랑에 빠져 괴로워했다. 꿈틀거리는 감정이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는 광복군 내에서 여비서를 흠모하는 사람이 많아 시기의 대상이 됐고, 조국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 연애질이나 하고 다닌다는 구설수에 올랐다. 여비서는 김구 주석의 판공관실 민필호의 딸이었다. 장준하는 김준엽과 얘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서로 진심으로 흠모하는 것을 알아챘다. 성적 충동에 이끌린 욕정이 아니라 순정 어린 애정이었고, 일시적인 외로움을 해갈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끝없는 사랑이었으며,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라 서로를 보듬어주려는 연정이라는 것을 느꼈다. 장준하는 가혹한 전쟁 때문에 사랑마저 거부하고 정신적인 불구자처럼 사는 걸 원치 않았다. 그는 김준엽에게 결혼을 주선했다. 두 사람에 대한 비소가 불쑥불쑥 나올 때는 애초부터 싹을 잘라버리는 게 나았다. 그는 개별적으로 동지들과 접촉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 주자는 여론도 형성했다. 두 사람은 장준하의 노력 끝에 모든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친구이자 평생 동지였던 장준하가 맡았다. 


장준하는 김준엽으로부터 이범석 장군의 의중도 전해 들었다. 이범석 장군은 장준하를 국내침투공작에 들여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장군은 장준하에게 기대가 컸다. 조국에 장준하를 보내면 십중팔구 죽을 게 뻔했다. 전쟁 중에 장준하 같은 영특한 인재를 길러내긴 어려웠다. 사사롭게 자신의 이익을 탐하지도 않았고, 겸손하고 공정한 성품이라 지휘자로도 손색이 없었다. 광복 이후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장준하가 허망하게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국내침투공작은 피값을 요구하는 전술이었다. 국내에서 수집한 정보를 송신하고,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모아 유격대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군사시설에 잠입해 파괴하고,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펼치며 미군의 한국 상륙작전을 도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