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 후 꺼내 든 일기장과 잡지 - 나의 분신, 나의 유산
장준하가 한국침투공작에서 맡은 지역은 서울이었다. 그곳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조직을 책임지고, 유격대를 이끌어야 했다. 그는 한국에 들어가면 무조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개인의 감정을 모두 없애고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해 결사항전해야 했다. 꺾이지 않은 결기와 필사적 용기로 조국 강토에 광복의 씨를 뿌려야 후대에 해방이라는 결실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는 이범석 장군과 김준엽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침투작전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살점이 뚝 떨어져 나가고, 길바닥에 피를 쏟아내더라도 출정의 깃발을 들고 자랑스럽게 전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장준하는 최종 명령을 기다리며 침투공작 준비에 착수했다. 먼저 이발소에 들려 머리털을 박박 밀었다. 마음을 다잡고 막중한 소임을 다하겠다는 의지였다. 어떤 어려움에도 낙담하지 않고, 나약해지지 않고 불굴의 주체성으로 꼭 민족의 정통성을 세워내겠다는 결의였다. 그는 멀쩡한 머리카락이 싹둑싹둑 잘려 바닥에 떨어지자 이상야릇한 감정에 휘말렸다. 현실적 조건과 속박에서 벗어난 것 같은 해방감을 주기도 했지만 조국 독립과 자유를 위해 몸 바친 혁명 전사들의 강건한 투지가 자신에게 새겨지는 듯했다.
미군은 한국침투공작의 적격자로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도병을 지명했다. 학도병들은 강제 징병으로 끌려가 일본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일본군에서 훈련을 받아 그쪽 소식과 언어에도 정통했다. 또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아 국내 사정도 밝았고, 전쟁 중에도 대학에 다니며 공부할 만큼 머리가 뛰어난 수재들이었다. 이들보다 나은 적격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장준하 일행은 모두 한국침투공작에 투입됐다. 전국방방곡곡에 네 명 혹은 다섯 명씩 팀을 이뤄 항일유격대로 배속됐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킬 대규모 일본열도 공격작전을 준비했다. 일백만 명 이상의 미군과 수백 척의 항공모함, 수천 기의 항공기 등이 참가해 일본을 침몰시키는 ‘몰락작전’이었다. 몰락작전은 일본의 방어선을 점멸시킬 핵폭격, 대규모 육해공군이 함께 일본 규수 남부로 상륙하는 올림픽작전, 올림픽작전을 은폐하기 위해 8만의 병력을 시코쿠에 상륙시키는 파스텔작전, 칠십만 명의 병력과 3천 기의 항공기를 동원해 도쿄로 진격하는 코로넷작전으로 구성됐다.
장준하는 삭발을 한 뒤 일기장으로 쓰던 노트 7권과 <등불> 다섯 권, <제단> 2권을 꺼내 들었다.
불속에 던져버린 삶의 미련 - 활활 타오르다
장준하는 한국침투공작에 참여하기 위해 사물함을 정리했다. 옷이나 생활용품, 신문이나 수첩 같은 것을 모두 꺼내 불에 태웠다. 없어도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았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물품이었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보면서 가슴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삶의 애착까지도 모두 불속에 던졌다. 26년의 삶과 결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미련도 가지면 안 됐다. 모든 것을 후련하고 깨끗하게 털어내야 한국침투공작도 성공할 수 있었다.
장준하는 일기장과 잡지 <등불>과 <제단>은 소각하지 않았다. 그는 1944년 7월 7일 일본군에서 탈출할 때부터 1년 1개월 동안 일기를 썼다.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는 잠시 미뤄뒀지만 하루하루 벌어진 갖가지 사건과 여러 곳에서 만난 인물들을 꼼꼼하게 노트에 기록했다. 일기에는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기장에는 배고픔과 갈증, 갈등과 반목으로 고생했던 사연부터 마음속에서 문득문득 뭉클하게 솟아오르던 감회까지 낱낱이 담겼다.
<등불>과 <제단>은 그가 실의와 허탈에 빠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 주던 매개였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시대정신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색의 산물이었으며, 동지들의 피땀으로 만들어낸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장준하는 일기장과 잡지를 큰 봉투에 넣어 포장했다. 봉투에는 가족들에게 남길 유서도 짧게 써넣었다. 봉투 겉면에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과 아내의 친정 주소를 적었다. 그는 김준엽을 찾아가 혹시라도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봉투를 가족들에게 우편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이범석 장군이 장준하를 호출했다. 한국침투공작에 참여하려는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의도였다. 이범석 장군의 의지도 있었지만 장준하를 아끼는 김준엽의 마음이 전해져 마련된 자리였다. 장준하는 황송한 마음에 몸 둘 바 몰랐다. 이 장군은 남다른 기개와 지사적 충정으로 광복군 안팎에서 존경을 받았다. 그런 인물이 자신과 면담하자고 청하니 송구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조국 독립의 한길에 몸 바치려는 장준하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일제의 사슬을 끊어내고 해방된 조국 땅에 묻히고 싶은 바람을 굽힐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민족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리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사방은 온통 조용했다. 풀벌레들이 요란하게 울어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범석 장군의 허락 - 나무그늘 아래에서
이범석 장군과 장준하는 나무그늘 아래에 앉았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한여름의 풍경을 감상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장준하였다. 원래 계획한 대로 자신을 한국침투공작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장군은 자신도 지금 당장 적진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지만 요동치는 국제정세를 보면 일본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제2지대에 남아 내일을 설계해 보자고 권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단호했다. 20여 개의 침투공작을 책임지고 있는 자신이 참가하지 않으면 많은 동지들의 의기를 꺾어놓을 것이며, 김준엽이 남아 제2지대를 지키고 있으니 광복 후 일들은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이범석 장군은 장준하의 한국침투공작을 허락했다. 자신이 처음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임시정부를 찾아갔을 때가 불현듯 떠올라서였다. 이 장군은 상해로 망명한 뒤 민족지도자들을 만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1916년 운남강무당에 입학해 독립군 장교가 됐다. 그는 촉망받는 기병장교였지만 삼일운동을 계기로 장교직을 사직하고 임시정부에 들어갔다.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논의 끝에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하고, 신흥무관학교의 고등군사반 교관으로 취임해 독립군 장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후 북로군정서의 군사 교관으로 부임해 사관연성소를 창설하고 600여 명의 생도들을 모집해 독립군 장교를 키워 냈다. 또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부대의 전투역량을 강화해서 국내 진공작전을 수차례 펼쳤다.
일본은 간도 지역에 출몰하는 독립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였다. 이범석 장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계곡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전적을 올렸다. 이후에도 십여 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독립운동사상 유례없는 승리를 거뒀다. 그는 1940년 중국 국민정부의 후원 아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참모장이 됐지만 참모장을 고사하고 광복군 제2지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광복군을 최정예군으로 육성하기 위해 훈련에 힘썼으며, 미국 전략정보국과 합작해 한국침투공작을 계획했다.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한국에 광복군을 침투해 거점을 확보하고, 한국에서 유격대를 조직하는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이었다. 38명의 광복군은 한국침투공작에 선발돼 출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숨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 마지막 향연
장준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건물 밖에서 터져 나오는 환성 소리에 깜짝 놀라 뛰어 나갔다. 충칭에 남아 있는 동지들이 제2대로 찾아와 먼저 온 동지들과 얼싸안으며 안부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환대했다. 비록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제2지대로 찾아와 여간 기쁜 게 아니었다.
김구 주석도 약속대로 시안을 찾았다. 장준하는 두 손을 잡고 따뜻하게 배웅하던 김 주석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 생생하게 떠올라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국침투공작을 앞두고 김구 주석과 동지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마련됐다. 장준하의 감회는 남달랐다. 총을 메고 조국으로 돌아가는 설렘에 가슴이 떨렸지만 동지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슬픔이 몰아쳐 코끝이 아릿했다. 동지들도 똑같았다. 결전의 날을 남겨두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마지막 흥을 모두 토해냈다. 무대를 휘저으며 춤을 췄고,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러재꼈다. 이범석 장군도 무대에 올라 특유의 언변으로 영감을 북돋았다. 패기 넘치는 청년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부하들을 잃으면서 절망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침통한 마음을 달래려고 울어봤자 부하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부하들의 사기가 저하될까 두려워 눈물을 꾹꾹 참으며 보내온 세월이었다.
연회는 짧고 굵게 끝났다. 한국침투공작이 목전에 다가왔다. 흥겨움도 슬픔도 모두 부질없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오로지 하나만 생각해야 했다. 두려움을 비집고 머릿속에 침투하는 번뇌와 망상, 공포와 불안을 이겨 내려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확신을 갖는 것이 필요했다. 장준하도 서울로 침투할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되면 조국 독립은 늦어질 것이고, 생명도 부지하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목숨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임해야 했다.
장준하는 똬리를 틀고 있던 구렁이가 군복 안으로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구렁이가 옷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꿈은 예전부터 길몽이라고 했다. 하는 일마다 순조롭게 풀려 복이 된다고 했다. 그는 혀를 늘름늘름 내뱉으며 꿈틀거리는 구렁이가 징그러웠지만 한국침투공작이 잘 풀릴 것 같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는 내일을 위해 모든 잡념을 물리치고 다시 곤한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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