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원한 조국 독립의 길 -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준하 일행이 환영회와 강의를 거절하자 다른 방법으로 자당 포섭공작이 시작됐다. 한두 명씩 술집으로 꾀어내 맛있는 음식과 술을 사 먹이거나 시시때때로 찾아와 차 마시는 시간을 가지면서 일행들을 들쑤셨다. 미인계나 이간책처럼 간교하고 비열한 방법을 동원한 정당도 있었다. 강직한 성격의 일행에게 전혀 먹히지 않을 방법이었지만 포섭공작은 점점 집요해졌다. 장준하는 앞으로는 독립운동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정당을 이익을 따지는 게 못마땅했다. 정치인이 아니라 일제를 몰아내고 주권을 찾기 위해 애쓰는 독립운동가가 돼주길 바랐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요인들이 자숙하는 자세로 겸허하게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조국 독립의 길도 요원해 보였다.
장준하는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모두 모이는 주회에 일행을 대표해 참여했다. 국내 사정에 어두운 교포들에게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실상을 보고하는 자리였다. 장준하는 강제 징용을 비롯해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는 누이들의 얘기를 전했다. 또 침략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초등학생까지 동원돼 고초를 겪는 사정도 알렸다. 교포들은 두 손을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어깨를 달싹거리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그는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작심한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군 항공대에 자원해 임시정부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데 임시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안팎으로 나뉘어 자기 이익 찾기에만 바쁘다고 꾸짖었다.
장준하가 말을 끝내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모두들 서럽게 흘리던 눈물을 멈추고 멍하니 앉아 그를 쳐다봤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장내를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장준하의 발언으로 주회는 산회됐고, 긴급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 장준하가 호출됐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혼내는 것처럼 그를 호되게 다그쳤다. 삼일운동의 피로 세워진 임시정부를 모욕하고, 교포들이 모인 자리에서 경망한 말을 늘어낸 것에 대해 사과를 요청했고, 이에 응당한 처벌을 내릴 것이라고 엄포했다. 과격해진 분위기를 중재한 사람은 김구 주석이었다. 그는 요인들에게 정숙을 요청하면서 장준하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장준하는 이때다 싶어 마음속 얘기를 모두 꺼내놓았다. 다시 한번 임시정부의 상황을 엄중하게 힐책하면서 조국의 앞날을 걱정했다.
탁월한 선택 - 자링 청수는 양쯔 탁류로
장준하는 임시정부의 힘으로 조국 독립을 쟁취하는 것에 회의를 품었다. 어려울 때일수록 한마음으로 힘을 보태야 했다. 해방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태극기 깃발 아래 하나로 단결해야 했다. 친일파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달하며 서로를 돕고, 일본군들은 독립운동가들을 말살하려는 의지로 가득한 마당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사분오열로 갈라져 싸우는 현실이 너무나 암담했다. 광복이 되더라도 갈기갈기 찢어져 서로 삿대질하는 임시정부의 기풍이 그대로 이어질 게 뻔했다.
김구 주석은 장준하의 얘기를 듣고 크게 웃더니 그를 돌려보냈다. 표현이 좀 과격했을 뿐이지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김 주석은 6천 리를 걸어 임시정부에 온 그의 진심 어린 충고를 받아들였고, 어느 누구도 꺼내지 못했던 임시정부의 고질적인 병폐를 밖으로 끄집어낸 기백을 높게 샀다. 긴급 국무회의는 내무부장이 조회에 나가 장준하의 발언에 대해 사과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끝을 맺었다.
장준하 일행은 임시정부의 분열과 정당의 포섭공작, 독립에 도움 되지 않는 논쟁에 신물이 나 <등불>을 속간하기로 했다. 일행들은 일필휘지로 글을 써 내려가며 <등불>을 완성했다. 임시정부를 향한 조언부터 조국의 암담한 현실, 수준 높은 시와 수필까지 직접 지어 실었다. 다행히 임시정부에 등사기가 있어 한 번만 정성 들여 글을 쓰면 여러 권을 인쇄할 수 있었다. <등불> 3호는 80부를 만들어 여러 정당과 단체, 교포사회에 배포했다.
일행은 회의를 소집해 임시정부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김구 주석에게도 투차오로 이동하겠다고 보고하고 여장을 꾸렸다. 투차오에는 중국진재위원회의 원조를 받아 세운 구호기관이 있었다. 이곳에는 조국에서 쫓겨난 한국인들이 거주했다.
충칭에는 장강 지류인 자링강이 흘렀다. 자링강은 물이 깨끗하고 맑기로 유명했다. 바위 틈에서 나오는 물이 모여 흘러 투명하고 차가웠다. 하지만 아래로 흘러 흘러 갈수록 탁한 장강과 합류해 본연의 성질을 잃었다. 장준하는 무릎을 탁 쳤다. 임시정부를 떠나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맑은 자링강이 동지들 같았고, 탁한 장강이 임시정부 같았다. 임시정부에 계속 머무르다 보면 동지들이 언제 탁하게 변할지 몰랐다. 또 자신들이 임시정부에 머물러 봤자 조국 독립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더러운 수작 - 경위대를 해체하라
장준하 일행은 투차오로 떠나기 전 해결할 일이 있었다. 정당에서 문란한 댄스파티를 열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었다. 충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은 당의 운영경비를 조달한다는 명분으로 추잡한 댄스파티를 열었다. 중국법상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함께 투쟁하는 동지들의 체면에 먹칠하는 꼴이었다.
장준하는 무너진 기강과 도덕적 해이가 부른 결과이자 독립 투쟁이 오랫동안 벌어지면서 찾아온 무료와 권태의 영향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동지 20여 명과 함께 몽둥이를 들고 댄스파티장에 난입해 콩알탄을 바닥에 뿌렸다. 콩알탄은 작은 충격에도 소리를 내며 터지는 화약이었다.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는 파티 참가자들은 바닥에서 터지는 콩알탄 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해 달아났고 정당 관계자들도 몽둥이를 들고 출입문을 지키는 장준하 일행을 보고 겁에 질려 자취를 감추었다. 일행이 댄스파티장 난입 사건을 벌인 뒤 충칭에서는 댄스파티가 열리지 않았다.
장준하 일행은 투차오에 도착해 기독청년회관에 숙소를 잡았다. 숙소는 신축 건물답게 깨끗했고 도심지와 떨어져 조용했다. 생활환경이 열악했던 임시정부 청사와는 대조적이었다. 장준하는 <등불> 발간에 힘을 쓰면서 동지들과 함께 엄격한 규율을 세우고 공부와 체력단련에 열중했다. 독립투사로서 품위를 잃지 않도록 흐트러지거나 나태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다.
임시정부에서 경위대를 조직한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내무부장이 장준하 일행을 한두 명씩 따로 불러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장준하는 일행이 임시정부 요인들과 만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아니 막을 수 없었다. 모양새가 임시정부를 적으로 삼는 것이기도 했고, 개인의 활동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기도 했다. 그러나 충칭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더니, 며칠 후 절반 가까이 되는 동지들이 떠나버렸다. 장준하 일행은 한 장짜리 <등불> 호외를 만들었다. 댄스파트장에 난입할 때 사용했던 몽둥이까지 지참하고 임시정부로 향했다. 일행은 임시정부 앞마당에 전단을 뿌리면서 경위대 해체를 외쳤고, 내무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항일투쟁에 나서겠다고 일본군을 탈출해 6천 리를 걸어온 젊은이들을 휘하에 두려는 수작을 묵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무부장이 이미 몸을 숨긴 뒤여서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경위대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들의 가족 경호, 한국광복군총사령부의 경비를 맡는 부대였다.
목불인견의 참상 - 김신일과 김신철
장준하 일행은 임시정부 앞에서 경위대 해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이범석 장군과 마주쳤다. 이 장군은 자신도 임시정부의 정치싸움에 지쳐 시안으로 떠났다면서 미군과 합작해 한국침투작전을 준비 중이니 시안으로 같이 가자고 권했다. 일행은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드디어 일본군을 멸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솟구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장준하는 김구 주석을 찾아 동의를 구했다. 김 주석은 일행이 시안으로 떠나는 것을 두 손 모아 환영했다.
장준하 일행은 시안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신분도 감춰야 했고, 지금까지 썼던 이름도 바꿔야 했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믿을 신(信)자를 돌림자로 써서 각각 김신철, 김신일로 이름을 지었다. 결의로 맺은 의형제 같은 이름이었다.
장준하는 시안으로 떠나기 전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들렀다. 수용소에는 누더기 차림의 포로 350여 명이 수용돼 있었다. 일본군들은 굶주린 표정으로 연합국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쳤다. 중국군을 향해 상반신을 굽실거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처지가 바뀌니 말과 행동이 변했다. 일본군들은 중국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 길에서 중국인을 발견하면 꿩이나 멧돼지를 사냥하는 것처럼 방아쇠를 당기며 웃곤 했다. 그러나 상황이 역전되니 악랄했던 얼굴을 감추고 중국군의 눈치 살피기 바빴다. 일본군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전쟁이라는 극악무도한 만행과 살육이 고귀한 인간성마저 비참하게 말살해 버린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장준하는 동정심과 증오심이 교차된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김구 주석이 장준하에게 편지를 보냈다. 세계기독교선교회에서 일하는 데커 박사와 만나 광복 후 한국기독교 재건문제를 상의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장준하는 통역을 맡은 김규식 박사와 동석해 데커 박사를 만났고, 이들의 면담은 타임지를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됐다. 일제는 한국 기독교를 탄압했다. 천황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라는 신권주의와 만인평등을 외치는 기독교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기독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지자 일제의 속박은 극에 달했다. 교회의 예배는 물론 성경을 금지했고, 종교 지도자들을 감옥에 가두면서 기독교는 말살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기독교 신앙에 몸담으면서 기독교는 독립운동의 가장 큰 세력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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