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36. 장준하 일대기 23 - 눈물바다가 되다

이동권 2023. 9. 1. 00:30

이봉창과 윤봉길의 사진 - 우리 임시정부 각료분들

김구 주석은 장준하 일행에게 임시정부 각료들을 소개했다.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선배 투사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검소한 옷차림이었다. 단순한 중국식 외투에 평범한 바지를 입었다. 그러나 하나 같이 깨끗했고 칼날 같이 바지 주름도 잡았다. 김 주석의 소개를 받은 사람들은 김규식, 이시영, 조소앙, 최동오, 신익희, 엄항섭, 차이석, 조완구, 황학수, 유림, 유동열 등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면 일행을 향해 짧게 머리를 숙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동지에 대한 예의를 엄격하게 지키는 인사였다. 


임정 요인들은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 대부분 청년의 눈빛처럼 맑았으나 겉모습은 영락없는 할아버지였다. 주름은 자글자글했고, 입가는 깊게 팼다. 장준하는 서글픈 마음에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임시정부에 모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중국 각지에서 유랑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보내왔던 30여 년의 세월은 새파란 젊은이들이 6천 리를 걸어온 7개월과 비교가 안 됐다.


장준하 일행은 임시정부 행정관의 안내를 따라 2층으로 향했다. 2층은 회의나 식사를 할 때 사용하는 홀이었다. 50여 명이 한꺼번에 잠을 자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면적이 넓었다. 벽 중앙에는 가로 2미터가 넘는 태극기가 걸렸고, 모자나 외투 등을 걸 수 있는 옷걸이가 있었다. 나열된 액자도 인상적이었다. 임시정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사진부터 여러 임정 요인들이 함께 찍은 단체사진까지 엇비슷이 걸려 있었다. 사진 중에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사진도 있었다. 두 사람은 김구 주석이 길러낸 광복군 전사였다. 


1932년 이봉창은 김구의 지시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히토 천황 암살에 나섰다. 그는 히로히토가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들어갈 때 수류탄을 던지려다 체포돼 사형당했다. 그의 유해는 광복 후 김구가 일본에게 인도받아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윤봉길은 김구와 거사를 구상한 뒤 야채상으로 위장해 미리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을 축하하는 기념식 정보를 파악했다. 그는 기념식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무대를 향해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를 죽였다. 또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25세의 젊은 나이에 총살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신문에 실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을 알렸고,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

당당하고 의젓한 풍채 - 주석 김구

장준하 일행은 2층 홀에 여장을 푼 뒤 임시정부 행정관을 따라 목욕탕으로 향했다. 중국 목욕탕은 컸다. 굴뚝도 하늘 높이 솟았다. 10킬로미터 밖에서도 목욕탕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대륙의 기질은 무엇이든 크고 넓게 만들었다. 목욕탕 안도 다르지 않았다. 식당이나 이발소 같은 편의시설이 함께 운영됐고, 300명이 이용할 수 있는 옷장이 한쪽 벽면에 설치됐다. 온탕은 50명이 한꺼번에 앉아도 북적거리지 않을 만큼 널찍했다. 일행은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린 뒤 묵은 때를 벗겼다. 진드기가 물어뜯어 오돌토돌한 살갗이 몰라보게 매끄러워졌다. 증기욕을 하는 곳에도 들어가 신기한 표정으로 땀을 뺐고, 냉탕에도 들어가 물장난을 치며 놀았다. 장준하는 더운물에 몸을 담그자 일시에 긴장이 탁 풀렸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가득 차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스르르 눈이 감겼다. 


장준하 일행은 목욕을 마치고 미리 지급된 광복군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군복은 푸르스름한 색에 양쪽 가슴에 주머니가 달렸다. 한국인의 체형에 맞게 제작돼서 그런지 맞춤옷처럼 몸에 잘 맞았다. 전투모는 눌러쓰면 눈썹을 살짝 덮을 정도로 챙이 짧았다. 일행은 새 옷으로 갈아입자 날아갈 듯이 기분이 산뜻했다. 라오허커우의 진드기와 파촉령의 추위, 전쟁 같은 행군 과정에서 젖었던 피땀을 모두 털어내고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일행은 임시정부 입성을 축하하는 환영식에 참여했다. 단상에는 김구 주석을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앉아 있었다. 장준하는 김 주석을 유심히 쳐다봤다. 맑고 또렷한 눈동자와 동그랗고 검은 안경테, 거구의 어깨를 감싼 하얀 두루마기, 잘록하고 단단하게 묶은 대님과 검은색 구두, 유장하지만 치밀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당당하고 의젓한 풍채였다.


김구는 1984년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피신해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했다. 이듬해 귀국한 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됐다. 그는 감옥에서 탈옥해 황해도에서 교사로 일하다 신민회에 참가했고, 일본인을 살해한 죄목으로 다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감형을 받고 출옥한 뒤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삼일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해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했고,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해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취임했다.

조국 잃은 슬픔 - 통곡의 바다

장준하 일행의 환영식에는 임시정부 각료를 비롯해 광복군총사령관과 직원 등 100여 명이 참여했다. 자금이 풍족하지 않아 음식은 간단했다. 도수 높은 중국 고량주와 깍두기, 건어물 같은 씹을 거리였다. 신익희 내무부장의 환영사와 김구 주석의 격려사가 끝난 뒤 장준하가 일행을 대신해 답사를 준비했다. 장준하는 일제의 통치 하에 태어나 임시정부까지 6천 리를 걸어왔던 소회를 밝혔다. 임시정부에서 태극기를 봤을 때의 감격과 조국 독립의 길을 개척하는데 목숨을 바치겠다는 다짐도 간곡하게 털어놓았다. 장준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흐느낌을 간신히 참으면서 말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장준하의 답사를 경청하며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급기야 김구 주석이 복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며 울자 장내는 울음바다가 됐다. 그때까지 입술을 깨물며 참던 장준하 일행도 눈물을 쏟았고, 장준하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술과 안주가 상 위에 올랐지만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밤 장준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옆에서 잠을 자는 일행들의 가느다란 숨소리, 이불 뒤척이는 소리, 잠에 들지 못한 일행이 내뱉는 한숨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난생처음으로 선배 투사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던 환영식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토록 꿈꿔 왔던 조국 독립을 위해, 수많은 선배 애국지사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결연히 나설 날이 드디어 온 것 같아 설레기도 했다.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도 장준하 일행을 격려하는 환영식을 열었다. 임시정부에서 10여 분을 걸어가면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었다. 이곳에는 한국군뿐만 아니라 중국군 장교들도 많이 파견 나와 있었다. 


환영식에는 임시정부에서 준비했던 음식보다 맛깔스러운 음식이 준비됐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음식에 손을 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복군 사령관이 격려사를 하면서 말끝을 흐리고 우는 통에 장내는 다시 눈물바다가 됐다. 


장준하 일행은 여러 단체에서 초대하는 환영회에 참가했다. 환영회는 대부분 눈물바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일행은 임시정부에 머물면서 외신과 인터뷰도 진행했고, 사진도 찍었다. 일본군을 탈출해 6천 리를 걸어 항일광복군이 된 사연은 전 세계에 보도돼 화제가 됐다.

임시정부의 속사정 - 분열과 분파

장준하는 충칭에 도착한 뒤 여러 정당과 단체가 주최한 환영식에 참가하면서 임시정부의 속사정을 조금씩 알게 됐다. 임시정부는 재정적으로 열악했다. 인원이 꽤 됐지만 숙소가 좁아 서로 따닥따닥 붙어 잠을 청했고, 볼일도 간이변소에서 해결했다. 변소는 칸막이가 낮아 일어서면 옆 칸 사람과 눈이 마주쳐 민망스러운 웃음을 지어야 했다. 음식도 맛이 아닌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으로 만족했고, 독립운동자금도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그때 급조했다. 초창기 임시정부는 한국 주요 인물들이 들고 온 독립자금과 인구세, 애국금 등을 걷어 운영됐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외국에 독립공채를 발행해 자금을 충당했다. 이 역시 임시정부와 미국에 있던 이승만의 갈등으로 난항이 계속되면서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후 독립운동자금은 중국의 지원금과 국내외에서 간간이 조달되는 돈으로 해결했지만 늘 부족했다. 


장준하는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열악한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넘칠 때도 있고, 부족할 때도 있는 게 돈이었다. 문제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분열과 대립이었다. 1920년대 독립운동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자기가 소속된 정당과 단체의 이익에 따라 자기주장만 펼치면서 분열을 거듭했고, 결국 뿔뿔이 흩어져 단체를 따로 꾸렸다. 청사를 충칭에 옮긴 뒤에도 계속해서 여러 정당과 단체가 난립했으며, 이들은 조국 독립을 위한 싸움보다 자기 세를 키우는데 열중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중국은 군웅할거의 폐풍이 뒤덮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통합을 요청했다. 그래서 1943년 모든 정당과 종교, 단체가 참여하는 임시정부가 새롭게 구성됐다. 임시정부에는 김구 주석이 소속된 한국독립당을 비롯해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무정부주의자연맹, 한국민족해방동맹, 한국청년당, 천도교 등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들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싸우면서 독립운동 자체를 어려운 상황으로 이끌었다. 


장준하 일행은 충칭에 머무는 동안 임시정부 요인들이 마련한 교양강의를 들었다. 강사들은 모두 존경할만한 선배 투사였지만 자기가 소속된 정당을 선전하거나 다른 당을 비방하면서 자당 포섭에 열을 올렸다. 장준하는 강의를 들으면서 귀를 의심했다. 함께 뭉쳐서 일을 도모해도 모자랄 판에 뒷전에서 비웃고 헐뜯는 모습이 시정잡배 같았다. 그는 함께 파촉령을 넘어온 동지들을 대상으로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정당, 단체, 종교 단체에서 초대하는 환영식과 강의를 모두 거절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