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32. 장준하 일대기 19 - 노잣돈을 챙겨 파촉령에 오르다

이동권 2023. 9. 1. 00:06

드러난 적개심 - 일군의 공습

장준하 일행은 임시정부에 도착하는 희망을 안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나 장준하는 거대한 군사기지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 숲을 베고 공장을 세운게 마땅치 않았다. 인간과 자연은 대립적이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보존하고 거기에 동화돼 살면 됐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려고만 했고, 명분 없이 일으킨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대기 위해 자연을 무참히 훼손했다. 


일행의 휴식은 돌연한 폭격기들의 등장으로 깨졌다. 자정 무렵이었다.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서 요란한 폭음이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일본군 폭격기가 군사기지에 줄폭탄을 떨어뜨렸다. 군사기지는 붉은 화염에 휩싸이며 무너져 내렸고, 하늘 위로 검붉은 연기가 솟구치며 밤공기를 태웠다. 군용 통신시설 창고에 쌓인 탄약도 덩달아 터지면서 시설물들이 번갯불처럼 희번덕거리며 내려앉았다.


강렬하고 굉굉한 폭음은 사흘째 이어졌다. 자정만 되면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일본군 폭격기가 나타나 맹폭격을 가했고, 군사시설에서는 한바탕 공포의 불 잔치가 펼쳐졌다. 장준하 일행은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숙소에서 빠져나와 인근에 마련된 방공호로 급히 몸을 숨겼다. 호 속에 들어가 머리와 어깨만 밖으로 내놓은 채 삽시간에 붉은 화염을 내뿜으며 허물어지는 군사시설을 쳐다봤다. 장준하는 전쟁의 광란이 만들어 낸 공포를 몸소 경험하면서 이를 갈았다. 삼십 년 넘게 한국을 지배해 온 일본에 대한 지긋지긋한 염증이었다. 오랜 시간 곪아온 민족의 염증을 풀기 위해서는 일본을 몰아내고 전쟁을 끝내는 길 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충칭으로 날아가 총을 들고 싸우고 싶은 생각 하나뿐이었다.


마지막 폭격이 있던 날 미군기 무스탕이 나타나 일본군 폭격기 한 대를 격추했다. 폭격기는 공중에서 한쪽 날개가 폭파돼 그대로 땅에 추락해 불타올랐다. 중국인들은 처참하게 부서진 폭격기가 떨어진 곳으로 몰려갔다. 거기에는 반쯤 탄 일본군 조종사와 격파된 비행기 잔해가 너저분했다. 중국인들은 조종사 시체를 조종석에서 꺼내 적의를 드러냈다. 증오와 혐오의 욕설을 퍼부으며 몽둥이로 매질을 했다. 또 축 늘어진 시체의 발목을 잡고 질질 끌고 다니며 구경을 시켰고, 시퍼렇게 멍든 시체를 동네 한가운데 매달았다. 중국군은 기체 잔해도 모두 수거해 주민들이 직접 눈으로 보게 했다.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중국군의 선전전이었다. 젊은 청년들의 중국군 입대를 독려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꺾이지 않은 의지 - 이간공작

일본군 폭격기가 격추된 뒤 더 이상 폭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장강도 세상 모든 것을 잊은 듯 잔잔한 풍랑을 일으키며 아래로 흘렀다. 장준하 일행은 모처럼 찾아온 평화를 즐겼다. 평온한 휴식을 취하면서 야윈 몸도 빠르게 회복됐다. 퉁퉁 붓고 근질근질했던 발가락도 진정됐다. 


충칭으로 가는 비행기를 구해준다는 소대장이 십여 일이 지나도록 깜깜무소식이었다. 장준하는 소대장을 찾아가 연유를 물었다. 전쟁 중에 중국군의 비행기를 구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 십분 이해하는 태도로 말했다. 소대장은 다른 얘기를 꺼내며 그의 입을 막았다. 충칭에 가지 말고 제1지대에 남아 함께 싸우자고 그를 설득했다. 소대장은 한국광복군 중 공산당 노선을 취하는 약산 김원봉의 부대였다.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의열단을 조직해 일제 수탈 기관을 파괴했고, 요인암살 같은 특수임무를 도맡아 했다.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과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면서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장준하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공산당은 자신과 맞지 않은 사상이었고, 일본군을 탈출한 목표도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소대장의 공작 때문에 많은 시일을 소비한 게 안타까웠지만 일행의 건강이 원상 복귀된 것으로 위안 삼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라오허커우에 머물던 기간이 크게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소대장이 장준하 일행을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중국 관내에서 50여 명이 넘는 분대 하나를 만들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것도 대학까지 다닌 지식인들로 구성된 학도병들을 모으는 건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일행 모두 한 소대를 이끌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견식이 충분한 장교들이었다.


소대장은 장준하 일행을 포섭하기 위해 집요하게 설득했다. 설득이 먹히지 않자 개별적으로 일행을  만나 와해시키려는 공작을 펼쳤다. 단 한 명이라도 제1지대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간질을 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말로 일행들의 관계를 뻐그러뜨리지 못했다. 일행 모두 처음 마음먹었던 그대로 충칭으로 가길 원했다. 


장준하는 서둘러 라오허커우를 떠날 채비를 했다. 그전에 해결할 숙제가 하나 있었다. 파촉령을 넘기 위한 준비였다. 파촉령은 새도 넘기 힘들다는 고개였다. 식량과 장비를 구할 노잣돈이 꼭 필요했다. 장준하는 당분간 라오허커우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낸 무대 - 거리 공연

장준하는 라오허커우에서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이간공작을 펼친 제5전구사령부와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파촉령을 넘을 노잣돈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과제를 풀기 위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지만 뚜렷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리쭝런 부대 정훈참모부가 장준하를 찾아와 장제스의 ‘15만 학도 종군운동 선무공작’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다. 중앙군관학교 졸업식 전야제에서 했던 공연이 훌륭했다는 평가가 중국 여러 부대에 알려져 있었다. 그는 정훈참모부의 제의를 허락했다. 선무공작은 학생들의 중국군 입대를 독려하기 위한 선전 활동이었다. 중국군은 징병제로 인원을 보충했다. 하지만 고질적은 부패가 만연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돈으로 사 대리 입대 시켰다. 대리 입대한 사람은 얼마 후 부대를 탈출해 또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재입대했다. 이런 방법으로 쉰 번 넘게 재입대한 사람도 있었다. 장제스는 중국군의 고질적인 부패를 혁신하고 탄탄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 선무공작을 마련했다. 선무공작은 원래 적국의 영토를 점령할 때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이 군에 협력하거나 적대감을 갖지 않도록 만드는 작전이었다. 수단은 신문, 연극, 영화, 방송 등을 동원했으며 주민의 의식주를 원조하고, 일상생활 보장하면서 마무리됐다. 차후 선무공장은 적군을 투항시키거나 군입대를 종용하는 등 다양한 목적에 이용됐다. 


장준하는 졸업식 전야제에서 선보였던 공연에 춤과 노래를 더욱 보강했다. 연극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드러내 달라는 요청에 따라 내용도 일부 수정했다. 그러나 연극에 참여했던 동지들 일부가 중앙군관학교에 남아 있어 새롭게 배우를 보충한 뒤 연습에 돌입했다. 연습할 시간은 이틀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벌써 라오허커우에 소재한 15개 중고등학교 순회공연 일자가 모두 잡힌 상황이었다.


장준하 일행의 공연은 반응이 좋았다. 전체적인 짜임새도 좋았지만 무대에 선 동지들이 재주가 많아 공연의 질도 높았고, 내용도 감동적이었다. 일행은 라오허커우 시민들의 앙코르 요청에 따라 시민회관에서 큰 공연까지 열었다. 학생들이 아니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이어서 의미가 매우 컸다. 일행은 빠듯한 일정 때문에 몸은 점점 지쳐갔지만 청중들이 박수를 치거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견뎌냈다. 젖 먹던 힘까지 내 무대에 섰다.

다시 시작된 행군 - 아~ 파촉령Ⅰ

일행 중 일부 동지들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장준하를 비롯해 10여 명이 라오허커우에서 순회공연을 다니던 동안 숙소에 남아 옴을 치료하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충칭으로 가는 길이 계속 지체되면서 근심에 휩싸였고, 장준하가 제5전구사령부와 모종의 뒷거래를 한 건 아닌지 의심했다. 


장준하는 동지들의 의견에 십분 동의하고 선발대 대장과 취사반장의 직을 내려놓았다. 다음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어떤 불평에도 떳떳했다. 그는 자신만을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대가를 바라고 헌신한 적도 없었으며, 투명하게 일처리를 했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게다가 파촉령은 험준한 고개라 특별히 선발대라는 게 필요 없었다. 서로 의지하며 하나처럼 움직여야 고개를 넘는 게 가능했다.


장준하 일행은 제5전구사령부과와 교섭을 벌여 15만 학도 종군운동 선무공작에 동원됐던 수고를 대신해 노잣돈을 챙겼다. 해발 삼천 미터가 넘는 파촉령을 오르는 동안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충분한 돈이 필요했다. 이들은 신발이며 양말, 생활필수품 등을 구입했고, 여비를 서로 똑같이 나눠 가진 뒤 도보행군에 나섰다. 하지만 김영록과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는 옴을 시름시름 앓은 데다 지병까지 겹쳐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산길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파촉령 초입은 인적미답의 원시림과 높직높직한 바위로  둘러싸였다. 구불구불한 굽이도 많았고, 깎아지는 절벽도 곳곳에 산재했다. 잠시 한눈을 팔거나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는 날에는 크게 다칠 만했다. 


오르막길은 눈이 소복이 쌓여 굉장히 미끄러웠다. 눈이 녹았다 다시 얼었는지 빙판길이었다. 일행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버르적거리면서 발라당발라당 넘어졌다. 그래서 원숭이처럼 바닥에 손을 짚고 기어오르다시피 행군했다. 폭설로 길이 끊어진 데도 있었다. 거대한 층암절벽이 앞을 가로막는 길도 나타났다. 그럴 때는 몸이 가벼운 사람이 먼저 올라가 밧줄을 내려 붙잡고 올라가도록 도왔다. 


장준하는 험한 길목에 들어설 때마다 일행의 행군을 살폈다. 그에게 배려는 자신을 위한 선물이었다. 타인을 먼저 걱정하고 안아주면 그만큼 자신에게도 행복이 돼 돌아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