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최고의 폭력이다.
햇빛에 반사되는 바다는 하얀 사파이어처럼 반짝였다. 파도가 요동칠 때마다 반짝임은 더했다. 청량하고 산뜻한 기분도 들었지만 어두컴컴한 심연이 하얀 이빨을 생그레 드러낸 것 같아 등골이 오싹해졌다. 바다를 쳐다볼 때마다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이 무한정 샘솟았기 때문이다.
충동에 이끌리는 것은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분한 일을 당할 때마다 크게 소리치거나 누군가의 멱살을 잡아 주고 싶었다. 노골적이고 도착적인 유희에 대한 욕구, 하다 못해 간간이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에도 빠졌다. 충동이 결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사회적 규범과 양심이 마음을 억누르기 때문이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뜨겁고 광폭한 충동은 누구에게나 있었고, 충동을 누르는 힘은 고통이었다.
인간은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거듭되는 충동을 조절하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충동을 어떻게 진정시키고 해소하느냐는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사람이 좀스럽고 불견실하면 충동은 충돌로 이어졌고, 도량이 넓고 착실하면 미리 좋지 않은 감정을 풀어 충동은 현실에 반영되지 않았다.
바다는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충동을 빈번히 느끼게 했다. 우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애쓰는 짐승처럼 나를 가두고 있는 격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본능을 용솟음치게 했다. 내 안에 잠재된 모든 종류의 욕구에 앞뒤 없이 빠져들게 했다.
의식보다 눈이 먼저 기억하는 풍경이 있다. 과학적으로 보면 눈으로 전달받은 신호가 뇌를 거쳐 감정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색채나 형상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에는 예상치 못한 충격과 함께 눈이 먼저 흥분하게 되고, 눈이 정신을 잡아먹는다. 사막에서는 정신이 아니라 몸이 먼저 기억하고 반응한다는 유목민의 말과 비슷한 이치다. 나에겐 바다가 그랬다. 이유 없이 바다에 이끌린 적이 많았다.
어느 해인가 무작정 바다로 간 적이 있었다. 고양이의 죽음을 본 뒤였다. 그날따라 사람들의 발걸음은 빨랐다. 버스는 피로하게 굴러갔고, 과일트럭 확성기만이 적막한 아파트 단지의 게으름을 깨웠다. 단조로운 일상을 채우는 도시의 풍광은 우울했다. 마치 불규칙하고 날카로운 음악 혹은 검은 우주를 뒤덮은 블랙홀 같았다. 생명의 광채를 잃은 도시의 움직임은 오줌을 누듯이 일률적이고 순간적이었으며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나는 길을 걷다 공원 풀숲에서 늙은 고양이가 큰 눈을 깜빡이며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고양이는 나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았다. 주인도, 친구도 없이 뻣뻣한 다리를 쭉 뻗고 누워서 크고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고양이는 도망갈 힘이 없었다.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넣고 고단한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은 메마른 숲에서 말라가는 수목의 죽음을 보는 것처럼 무척 구슬펐다. 1)
도시에 사는 짐승은 대개 슬퍼 보였다. 짖거나, 꼬리를 흔들거나, 시무룩하거나, 곤한 낮잠에 빠져 있어도 외롭고 짠해 보여 슬픈 인상을 줬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슬프게 보일 때가 있었다. 아프거나, 사업이 안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해 울부짖는 모습은 그렇게 슬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하거나, 지그시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겨 있거나, 흘러가는 강물을 한없이 바라보면서 넋이 나가 있을 때 슬퍼 보였다. 그것은 짐승의 슬픈 모습과 닮았다.
사람이 울부짖을 수 있다는 것은 온갖 좌절과 방해 속에서도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격한 감정마저 사라지고 공포마저 느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사람은 천근의 무게에 짓눌려 절규나 비명마저 지를 수 없게 된다.
고양이는 성교의 환희를 느끼는 것처럼 다리를 떨며 긴 울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죽었다. 탄생과 성장과 소멸이라는 생명의 비밀을 알려 주면서 숨을 거뒀다. 나는 꽃도, 무덤도 없는 슬픈 짐승을 위해 특별한 위로를 해주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지 않도록 봉지에 넣어 한쪽으로 치워 주는 것이 전부였다. 2)
고양이의 장례는 잠시였다. 어느 누구도 봉지 안의 고양이를 애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위를 배회하는 짐승들도 버려진 고기 조각을 찾으려고 기웃거릴 뿐, 늙은 고양이 앞에서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짐승은 죽어서도 슬프고 고독했다. 하찮은 죽음에는 하찮은 추모가 따랐다. 거리는 여전히 화장품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으로 넘쳤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분주하게 오갔다.
사람의 죽음이 짐승과 다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전쟁이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남긴 참상은 하찮음의 정도가 짐승보다 심했다. 20세기 역사 중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독일군의 유대인 학살이 그랬다. 독일군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독가스로 수천만 명의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죽였다. 그것도 모자라 죽은 사람의 몸을 여기저기 뜯고 잘랐다. 망자의 머리카락은 잘라 카펫을 짰고, 피부는 벗겨서 비누를 만들었다. 3)
우리나라에서도 짐승의 죽음보다 못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도 그랬지만 한국전쟁 전후는 끔찍한 학살로 점철된 때였다. 좌우 가릴 것 없이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에도 사람들은 혀만 끌끌 찼다. 불쌍하거나 잘못됐다고 여기는 눈빛은 없었다. 서로에게 침을 튀겨 가며 증오의 욕설을 배설하기 바빴다.
지금이라도 피투성이가 된 얼굴들을 하나하나 되살려 위로해야 하지만 아직도 그 얼굴들은 이데올로기라는 콘크리트 무덤에 갇혀 지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위한 위로는 재물이나 제사가 아니라 올바른 재생이다. 이들의 죽음을 올바르게 기억하고, 그 죽음이 남긴 의미를 현세에서 똑바로 재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로다. 먼저 진실을 알아야 하고 그다음엔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끊어진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를 여는 가교다.
연평도에서 두 차례 포격전이 벌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 간에 대규모로 벌어진 유혈참극이었다. 교전의 결과는 나에게 상당한 슬픔과 충격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국군 장병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후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북한 사람들을 죽여야 할 대상으로 여기거나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종북 빨갱이라는 오명을 덧씌워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역감정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모욕하고 증오하는 일이 벌어졌다. 4)
소름이 돋았다.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이 뿌리 깊은 증오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분파주의적인 편협으로 우리 사회에 재생산돼 또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땅거미가 깔릴 무렵 바다에 도착했다. 바다에 도착하기 전까지 고양이의 잔상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다행스럽게도 바다를 보자마자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새로 도배한 방에 들어가는 것처럼 지저분하게 얼룩졌던 마음이 깨끗해졌다. 나는 거대한 자연의 힘을 새삼 느끼며 검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바다에 가슴을 내줬다.
백사장에는 오른손으로 소주병을 들고 조용히 바다를 응시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도시에 사는 짐승처럼 슬퍼 보였다. 표정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미묘했다. 그의 표정은 큰 시련을 겪은 사람처럼 비통해 보였지만 성모 마리아의 미소처럼 온화한 빛으로 가득했다. 남자는 자신의 삶을 읽어 내려는 듯 깊은 명상에 젖어 있었다.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하루를 보내는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깊은 성찰의 시간과 마주한 듯했다. 이런 시간은 주로 감당할 수 없는 경험을 할 때 찾아온다.
어떤 일을 당했든 자신의 영혼과 마주한 채 적나라하게 자신을 파헤쳐 본다는 것은 슬픔과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영혼은 아름답게 채워지고 불면의 밤을 이겨 낼 용기가 생긴다. 그러나 걱정스러웠다. 나는 그에게서 심상치 않은 살기가 느껴져 발을 뗄 수 없었다. ‘저 사람, 혹시 자살을…….’ 말을 걸어 볼까도 했다. 그러면 만일의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나는 단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죽음을 거부하며 도와 달라고 소리치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나서서 그의 명상을 방해할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자리를 옮겼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남자는 바다 깊숙이 가라앉는 낚시 바늘처럼 점점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사람은 짐승과 다르게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 아니면 교육을 통해 자살을 꺼려하거나 반감을 표시해 왔던 사람이 현실의 어려움에서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거의 희박하다. 그래서 사람이 절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자연사와 동등하다고 할 수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린 삶, 해일처럼 밀려오는 절망이나 숨 막히는 고통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단호하게 목숨을 포기하는 상황은 자연사로 봐야 했다.
자살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아픔은 따로 있었다. 자살하는 사람을 욕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들이 남긴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가난과 폭력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세상에 작은 씨앗을 뿌리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을 향해 울지 않았다. 세상이 그들에 의해 좀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바뀔지라도 깊이 애도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자기 살기만 바쁠 뿐이었고, 죽는 사람만 바보였다.
남자가 계속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할 수 없이 두어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다시 바다로 갔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없었다.
1) 고양이의 둥근 눈은 사람과 같이 양안시다. 양안시는 양쪽 눈의 망막에 맺힌 대상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보기 때문에 눈의 기능이 뛰어나다.
고양이가 눈을 조심스럽게 감았다 떴다. 나에게 어떤 경계심이 없다는 신호였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눈빛이기도 했다. 나는 고양이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죽음을 생각하되 나약해지지 말고 더욱 강해지기로 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죽음은 생명을 가진 것의 숙명이지만 그 때문에 삶은 보다 깊고 섬세하게 채워지기도 한다.
2) 죽음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최고의 공포다. 고양이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영문도 모른 채, 어처구니없는 연유로 끌려가 죽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끔찍한 공포가 전신을 옥좼다.
3) 아우슈비츠는 독일 나치의 강제 수용소다. 이곳에서는 1백5십만 명의 수용자가 굶주림과 고문에 시달리다 살해됐다. 가스실에서는 대량 학살도 벌어졌다. 이곳에서 벌어진 참상은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역사로 평가받고 있다.
4) 1999년 6월 15일 연평도 근해에서 남북간의 교전이 벌어졌다. 이른바 연평해전이다.
북측 경비정 4척이 꽃게잡이 어선 20척과 함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2km 해역까지 내려와 조업하자 남측 해군이 고속정과 초계함 10여 척을 동원해 선체를 충돌시키는 밀어내기식 공격을 감행했다. 공격을 받은 북측 경비정은 기관포로 선제 사격을 시작했고 남측 해군도 북측에 응사해 결국 양측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됐다. 연평해전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은 북방한계선에 관한 사실이다.
NLL(북방한계선)에 대한 남북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 NLL은 1953년 UN군 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정한 해상분계선이다. 한국전쟁 휴전의 결과물도 아니기 때문에 북한에 통보된 적도 없었다. 사실상 미국이 마음대로 정한 한계선인 셈이다. 그래서 북측이 NLL을 넘어와 조업을 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하지만 남측은 남북 기본합의서를 전제로 북측의 NLL 침범을 주장하고 있다.
남북은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처음으로 NLL에 대해 언급했다. 합의서에는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라고 짧게 명시돼 있다. 이 내용에서 남측은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는 입장으로 북한의 NLL 침범을 주장한다. 반면 북측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로 입장이 다른 이상 연평도에서는 남북의 충돌 조짐이 늘 상주할 수밖에 없다.
돈을 벌어야 살 수 있지만 이것에 너무 깊이 말려들면 깊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죽음에 직면할 때 덧없음으로 큰 고통을 받게 된다. 죽음의 바로도(스스로 죽어 감을 인식하고 다른 마음의 상태로 바뀌는 시기)에 누군가가 ‘당신은 어떻게 삶을 살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대답을 위해서라도 마음의 본성을 확고히 하며 살아갈 것이다.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감정과 지적인 허울도 벗어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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