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안타까운 하루는 시간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 보내는 낮과 밤이다.
여객선은 뿌 하는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부두를 떠났다. 어찌나 그 소리가 우렁찬지 부두의 오전은 단박에 활기로 넘쳤다. 배가 움직이자 갈매기들이 은빛 날개를 치며 뒤따랐다.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 위로 수십 마리의 갈매기 떼가 나는 모습은 황홀하다기보다는 일대 장관이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누렇고 검은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마치 물고기처럼 넓은 등지느러미를 수면 위로 드러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쓰레기가 많았다. 도시 구석마다 구질구질한 쓰레기가 우북수북 쌓여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나는 길가에 구접스레 나뒹구는 쓰레기를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모두 인간이 버린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그것이 싫어 ‘자기집 앞마당에는 이렇게 버리지 않겠지.’라고 투덜거리며 거리에 방치된 깡통을 뻥뻥 차버렸다. 지금은 재미로라도 깡통을 차지 않는다. 생활의 옳고 그름, 잘잘못 또한 모두 인간이 정한 것에 불과했다. 쓰레기가 나뒹구는 것이 어쩌면 더욱 인간적인 것이었다.
쓰레기 중에 가장 골칫거리는 뻥뻥 찰 수도 없고, 쓰레기봉투에도 넣을 수 없는 인간쓰레기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저질은 썩은 음식에 악착같이 달라드는 쉬파리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언론에 이름을 팔며 득이 되는 곳에만 얼굴을 들이미는 족당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자신을 과시하는 동시에 짓밟아 버려야 할 대상이 항상 필요했다. 어리석은 자와 원수였다.
이런 사람들이 판을 칠수록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공격성을 띄었다. 전쟁도 불사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반공의식으로 튼튼하게 무장했다. 그것이 마치 애국이자 자신에게 권세와 부를 줄 것처럼 다른 이들의 인권과 자유를 말살했다. 사람의 성분만 가지고 국가의 치안문제를 논하는 일도 벌어졌고, 민주화와 공영을 위해 군사혁명을 일으켰다는 헛구호도 난무했다. 얼치기도 이런 얼치기가 없었다.
여객선이 속력을 냈다. 육지와 멀어질수록 바다는 점점 청록색으로 변했다. 부두에서 맡았던 비린내도 사라졌다. 혼탁한 도시 공기에 찌든 후각이 새 생명을 얻은 것 같았다. 여객선은 유람선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유람선은 보는 것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켜 심신을 지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반면 여객선은 빠르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배는 배였다. 낭만이 있었다.
바다는 두 쪽으로 갈렸다. 파도는 뱃머리에서 부서졌다. 바다는 한 폭의 그림으로 각색되면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내 마음도 바다를 따라 넘실넘실 파도쳤다.
나는 성격이 순한 편이었지만 ‘악바리’ 같은 게 있었다. 뭔가를 시작하면 승패를 떠나 어떻게든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쉼 없이 일렁이는 파도를 보니 그런 성격은 단편적인 행동양식에 불과했다. 조급증과 공포심이 부른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죽음을 마지막에 두고 파도처럼 끊임없이 출렁이며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진짜 악바리였다.
배는 한참을 달렸다. 눈앞에 사람이 살지 않은 작은 섬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나는 그 섬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짐을 하나하나 풀었다. 여행하는 동안 바다와 나눌 대화에 어떠한 제한을 두지 않고 모두 내보이기로 했다. 한 남자가 옷을 하나하나 벗으면서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영화 속 장면처럼 어차피 꺼내놓아도 별 볼일 없었고, 가죽과 뼈만 남은 야윈 맨몸뚱이였다.
사람들은 옷으로 자신을 감췄다. 가식적인 심장소리, 거만하게 부푼 성기, 공포나 전율 같은 불안, 사회적 지위나 재산의 정도를 옷으로 뒤덮었다. 거기에 외형적으로 멋지게 짜깁기해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만약 사람의 눈이 엑스레이처럼 인체의 내부를 투시할 수 있었다면 몸을 가리거나 치장하는 용도로서의 옷은 불필요했다. 옷은 몸을 보호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패션은 첨단 자본을 대변하지도 못했고, 계급을 나누는 액세서리로써도 무의미했다. 예술가들도 감정을 감추거나 부와 명예를 과장하며 사는 현대인을 은유하는 소재로 옷을 차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있는 그대로 내 진심을 표현하면서 살지 못했다. 짐승이 아닌 바에야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진심을 모두 드러낸다는 것은 발가벗는 것 이상의 수치심을 갖게 했다. 너무도 미약하고, 부족하고, 소심한 나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끔찍한 고통이었다.
가끔씩 술자리에서 술을 먹여 상대방의 가식을 다 벗겨 놓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봤다. 속옷마저 홀랑 벗겨 마지막 패행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맨몸이 됐다. 살점이 뚝 떨어져 나가고 피가 줄줄 흐르는 모습을 보려고 모여든 구경꾼들을 위해서 대번에 등가죽을 벗었다. 하지만 정작 나의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실망스러워했고,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나를 서슴없이 ‘개망나니’라고 불렀다.
나는 진심을 완벽하게 감추거나 내보이는 것보다 인내하고 조절할 때 더욱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분노가 그랬다. 살면서 화나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화가 난 원인을 나에게서 찾았고, 대화로 평화롭게 해결하기를 원했다. 그 화를 참지 못하고 제멋대로 발산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상처만 남겼다. 끝내 관계 또한 뒤틀리고 말았다. 1)
바다 습기가 머리에 엉겨 붙었다 금방 사라졌다.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태양 때문이었다. 나는 이따금씩 손을 이마에 대고 태양 한가운데를 바라봤다. 겨울밤 성탄을 기리는 꽃불이 일순간에 터졌다 사라지는 것 같은 황홀을 경험하고 싶었다.
눈부신 태양은 진귀한 보석처럼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이제 막 동면에서 깨어난 동물처럼 실눈을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시간은 깊은 안정감을 주었다. 태양의 정점을 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동안 오롯이 감각에만 집중하면 잡다한 사념들이 사라지곤 했다. 마음속에 칼끝처럼 파고드는 번민도 잠재울 수 있었다. 나는 바다에서 그 몇 초의 시간을 느끼고 싶어 시나브로 태양을 쳐다봤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내 삶을 변화시키는 아주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멋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아예 인지하지 못한 채 쳇바퀴 돌듯이 사는 사람도 많다. 자신이 천년만년 살 줄 아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고, 평생을 물질에 쫓겨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고, 삶이 점점 더 공허해진다는 것은 똑같이 느꼈다. 시간은 사람의 원천적인 고통과 중첩돼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인지하면서부터 진짜 내 삶은 시작됐다. 그때부터 삶에서 가장 값진 것들을 건질 수 있었다. 시간이 주는 근본적인 외로움과 삶의 허무는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됐고, 내 삶뿐만 아니라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가볍게 볼 수 없게 됐다. 2)
세상에 태어나 자신이 늙어 가고 죽어 가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늪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지금도 그러거나 말거나 거침없이, 단 일 초도 멈추지 않고 야속하게 흘러만 간다.
바다는 출렁였다. 자신의 몸이 뜨거운 햇볕에 타는 줄 모르고 열심히 가슴에 불을 질러 파도를 일으켰다. 그 모습은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마음을 쓰는 것과 같았다. 나는 생명을 잉태하면서부터 시작된 통증을 기꺼이 받아들인 채 자애로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기만 했던 어머니가 생각나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어머니가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하고, 어머니가 도움을 주었던 것처럼 돕고, 어머니가 친절했던 것처럼 친절하고, 어머니가 나눠 줬던 것처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살아왔던 것과 다른 삶을 살았다. 오직 나만 생각하면서, 작은 무시를 당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정말 괴죄죄하게 못났다.
1) 진심을 표현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내 행동에 때때로 만족을 주기도 했지만 그 결과가 미치는 영향은 훨씬 대단했다. 그런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극심한 자책과 외로움을 겪었다.
2) 바다에서 시간의 흐름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등대다. 등대의 불빛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깜빡이기 시작하면 밤이 찾아온 것이다. 등대는 밤에 뱃길, 위험한 곳 등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의미 때문에 문학가들은 등대를 앞날을 비춰주는 사람이나 역사적 사실로 비유하곤 했다. 특히 등대는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같은 존재로 은유됐다.
나는 주말만 되면 어디로 떠날까 고민했다. 가까운 곳에 가려니 식상하고, 먼 곳에 가려니 여비가 만만치 않게 들지만 가끔씩은 색다른 재미를 느껴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돈이 좀 들더라도 괜찮은 코스가 있다면 언제든지 지갑을 열 준비를 했다. 그런데도 정말 갈 데가 마땅치 않았다. 그럴 때는 전에 갔던 곳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서 나는 색다른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여행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먹고, 코로 냄새 맡고, 피부에 닿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사색이 중요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사색해 보는 시간은 이미 가본 여행지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래서 나는 옛 동무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낯설지 않은 곳으로 가끔씩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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