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싸워 이겨 내는 것만큼 힘겨운 투쟁은 없다.
눈앞에 바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바다는 스냅사진처럼 순간순간 정지됐다. 파도는 마음속의 날카로운 감정을 따라 우르르 몰려왔다 밀려갔다. 모든 것으로부터 탈출했다고 믿었건만, 다시 일상은 뒤꽁무니에서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무엇 때문일까.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이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인적이 드물고 고립감을 느끼게 하는 바다가 필요했다.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는 배를 타기로 했다.
저 멀리 고삐 잡힌 황소처럼 점잖게 부두에 정박해 있는 여객선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똑딱선 한 척이 으슥하게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나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갯내를 한껏 들이키며 여객터미널을 향해 걸었다. 여객터미널에는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배를 타려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막상 매표소 앞에 서자 판단이 서질 않았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섬을 목적지로 정했다.
배표를 끊어놓고 한참을 망설였다. 외로웠다. 두려웠다. 적막한 밤, 홀로 나와의 끝 간 데 없는 대화를 나눠야 하는 상황이 벌써부터 끔찍했다. 나는 그냥 떠나기로 했다. 여기서는 별다른 해답이 없었다.
도시는 득실거렸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 크게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답 없는 논쟁도 그치질 않았다. 서로 헐뜯고, 시기하며, 비방했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려는지, 화난 표정으로 앞만 보며 걸었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딱 각다귀판이었다.
조금만 더 세상을 자세하게 둘러보면 순식간에 현기증이 일었다. 사회의 무관심과 폭력에 멍든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기차역 주변을 기웃거리는 노숙자들, 생계를 잇기 위해 몸이 아파도 쉬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곱은 손을 입김으로 녹여 가며 작은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노점상 할머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모른 척하고 나만 생각하며 살면 그만이었지만 도시는 참으로 답답하고 울적한 기분에 젖게 했다.
부두에는 파란색과 하얀색으로 도색된 큰 배가 정박해 있었다. 배는 모퉁이마다 칠이 벗겨질 정도로 낡았지만 정겹고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세기를 초월한 바다의 역사가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이 배가 잦은 폭풍우와 거센 파도에 마모되는 동안 실어 나른 사람과 물건을 바다에 진열하면 인천 앞바다를 온통 뒤덮을 것 같았다.
승선 시간이 다가오자 부두에 사람들이 몰렸다. 파도는 부두에 부딪칠 때마다 하얀 물보라를 날리며 사람들을 반겼다.
나는 마지막으로 배에 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그 많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1)
선실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를 배낭에 쑤셔 넣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 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보지도 않고 지워버리는 스팸 문자마저도 어쩌면 세상과 끈끈하게 연결된 통로였다.
선미 갑판으로 나섰다. 선실에 사람이 많아 복잡하기도 했지만 청량한 바다 냄새를 더욱 가까이 맡고 싶었다. 나는 잔잔하게 흔들리는 선실 복도를 지나 갑판으로 향하는 철문을 열었다. 갑판이 그리 위험하지 않은지 나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어물전에서나 맡을 수 있는 찝찌름한 냄새가 바다에서 물큰 풍겨왔다. 썩은 생선 냄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습한 기운도 가득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물고 온 짠 물기였다.
하늘은 검붉었다. 곧 빗방울이 쏟아질 것처럼 음습한 기운이 뻗쳐 있었다. 바람이 계속 불어와서 그런지 생각처럼 꿉꿉하지는 않았다.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억센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길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미리 예고하려는 것처럼 바람은 차갑고 거칠게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가슴 한구석이 휑했다. 방 안 한가운데에 아무것도 없이 소주병만 놓여 있는 것처럼 커다란 쓸쓸함이 내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이 흔들어 놓았다. 홀로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바다도 고독해 보였다. 늘 그 자리에서 그지없이 오랜 세월을 홀로 힘겹게 견디는 것 같았다. 나는 한없이 뻗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내 삶도 바다처럼 고독이 뻗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홀로 죽음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인간의 숙명과 같이 나에게도 애초부터 고독한 운명이 이미 정해졌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나에게는 친구들, 따뜻한 인연이 됐던 지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진정으로 품 안에 끌어들이지 못했다. 어리석고 부족한 내 성품이 낳은 결과만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변함없이 그 길만을 걸었다. 나 또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던지, 이미 정해져 있는 그 길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서로 엇갈리고 잊히고 외면하다 결국 서로 다른 길에 들어섰다.
나는 혼자라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사사로운 것에도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로 변변치 않은 성품이었지만 한 곳에 정주해 일가를 이루거나 아늑한 위락을 맛보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근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까다롭게 잘잘못을 논하는 것도 나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삶과 생각이 있었고, 그것을 존중하지 못하는 나를 책망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사회적으로 얻은 아주 작은 명성까지도 과감하게 놓아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까짓 일로 흔들릴 내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평화였고, 약간의 휴식과 노동 그리고 식사면 충분했다.
내가 심히 두려워했던 것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각목과 돌멩이에 맞아 죽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밤중에 누군가의 손에 끌려 나와 복날 개 두들겨 맞듯이 맞아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 숨을 거두는 것이었다. 총알에 구멍 뚫려 죽으나, 대창에 찔려 죽으나, 몽둥이에 맞아 죽으나 이판저판 다 마찬가지지만 단숨에 숨이 끊어지지 않은 고통은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게 했다. 내가 지은 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뿐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틀렸다고 말했다. 풍족하고 안정적으로 사는 것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는 얼마나 더 가져야 하고, 얼마나 만족하지 못해 저러나 싶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일상을 나누며 울고 웃는 우리 이웃들이었다. 실적을 타박하는 상사의 불호령에도 처자식 생각하며 웃어넘기는 회사원이었고,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가족을 위해 맛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엄마였고, 자본의 탄압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팔뚝질하는 노동자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행복은 행복을 말하지 않게 됐을 때 비로소 찾아오며, 영혼의 위안은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연민에 휘둘리지 않을 때야 비로소 얻어진다는 것을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런 세상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지 그냥 오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이웃의 단합된 힘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일이었다. 나는 사는 동안 거기에 털끝 하나라도 기여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다는 내 속 마음을 알고 있었다. 비록 삶은 개망나니였지만 바다와 내가 나눈 숱한 대화 좀 더 나은 세상과 관련된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2)
1)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는 중국으로 취항하는 국제여객터미널과 도서지방이나 제주도로 취항하는 연안여객터미널이 있다. 자동차나 비행기 여행도 감상적이지만 배를 타는 낭만도 만만치 않다.
2) 나에게 이번 여행은 새로움을 경험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배우거나 깨닫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었고, 삶에 취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아무리 작고 사소한 여행이라도 기쁘고 즐거웠다. 말없이 무언가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삶을 나누게 했고, 부족한 나를 비춰 보게 했다. 나는 젊었을 때 떠들썩하게 살면서도 나 자신을 바라보는 아주 작은 모험마저 외면해 왔다. 치유의 근원도, 자신을 기쁨 속에만 묶어 두려 해서 숭고한 삶의 의미를 망각해 버린 안일함도 모두 나에게 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아주 혹독한 여행 때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가치를 내려놓고, 오직 나에게만 집중했던 시간을 보내면서, 왜 내 삶은 그토록 고통스러웠고 마음은 불안에 떨어야 했는지 알게 됐다. 이후 나는 개망나니가 됐다. 세상의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다웠고 동시에 하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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