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의 피바람 - 두 개의 중국군, 중앙군과 팔로군
전투는 의외로 싱거웠다. 적의 소굴을 박살 내기 위해 벌이는 전투가 아니었다. 용기백배해 목숨을 불사르는 치열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퉁탕퉁탕 총소리만 났을 뿐이지 치명적인 타격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적들을 쫓아내려는 티가 팍팍 났다. 전투가 어이없이 진행되는 이유가 있었다.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일본군과 중국군의 교전이 아니었다. 중국군이 중앙군과 팔로군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이었다. 물론 사령부에 떨어진 수류탄도 팔로군의 소행이었다.
국민당은 1921년 제국주의와 군벌을 타도하고 민족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공산당과 제1차 국공합작을 단행했다. 제2차 국공합작은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 계기가 됐다. 국민당은 공산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을 미심쩍어했다. 공산당이 국민당의 군사위원회에 종속됐지만 일본과의 전쟁보다 해방구 건설에 열을 올려서였다. 또 국민당을 주도했던 장제스는 1936년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다 그들에게 사로잡혀 감금당한 적도 있었다. 국민당은 일본이 침략하자 공산당과 항일통일전선을 형성했지만 그들의 저의를 항상 의심했고, 전선에서도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았다.
장준하는 기가 막혔다. 당의 목적을 위해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들이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특히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몰렸는데도 불구하고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산화에 열을 올리는 공산당을 음흉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해방 후 반공주의자가 된 배경도 당시 겪었던 중국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공산당의 영토 장악을 막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면서까지 동족상잔의 피바람을 일으킨 국민당에 대해서도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팔로군의 규모는 상당했다. 흐지부지하며 벌어지는 전투에서도 사령부는 계속 밀렸다. 사령부는 불로하강 진지에서 후퇴하기로 결정하고 북쪽 산을 넘어 집결하기로 했다.
산은 바위가 암암히 솟은 바위로 덮여 있었다. 한여름의 태양을 피할 곳이 전혀 없었다. 장준하는 험난한 산길을 오르면서 땀에 흠뻑 젖었다. 새벽녘에 기습을 당한 터라 갈증과 시장기도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장준하는 쓰카다 부대에서 탈출할 때의 일들을 떠올리며 인내했다.
사령관의 죽음 - 퇴각명령
장준하는 봉우리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중앙군과 팔로군의 총격전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전방도 후방도 없는 싸움이 연이어 펼쳐졌다. 시시하게 볼 전투는 아니었다. 격렬한 타기와 지긋지긋한 혐오가 부딪치는 현장이었다. 적의는 침략자 일본군에게만 있지 않았다. 시퍼런 긴장감은 같은 민족끼리도 사상과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아웅다웅 부딪쳤다.
장준하 일행은 저녁 무렵 산을 넘어 반대편으로 내려와 마을에 당도했다. 마을은 중앙군의 연락책이 부대를 오가며 머무는 곳이었고, 중앙군과 마을 주민들의 관계도 깊었다. 갈증이 심했던 일행은 목부터 축였다. 냉수를 벌컥 들이마시며 캬 하고 외마디 탄성을 토했다. 중앙군은 마을 주민들에게 약간의 음식도 얻어 배를 채웠다. 새벽에 전투가 벌어진 뒤 18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군인들의 입가에는 허옇게 침이 말라 붙어 있었다.
장준하 일행은 배를 채운 뒤 매미들이 매암매암 울어대는 큰 느티나무 밑에 자리 잡고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포연에 휩싸인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평정심이 밀려왔다. 그러나 사령관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당도했다. 장준하는 비통했다. 아주 가까운 친구를 잃은 것처럼 슬펐다. 일본군이 포로 교환을 제시했을 때 기꺼이 방패막이 돼 주었던 사령관이었다. 일행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육신은 언젠가 죽어 썩게 마련이지만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령관을 이렇게 허망하게 하늘나라로 보내야 하는 건지 몹시 달상했다.
장준하 일행은 다시 길을 걸어 사령부 후퇴 집결지에 도착했다. 집결지에는 이미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돌덩어리처럼 굳었다. 비애와 통분이 뒤죽박죽 섞인 모습이었다. 전선에서 밀려난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령관의 죽음이 컸다. 사령관은 전투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능력도 탁월했지만 항상 부드럽고 온화하게 부하들을 대했다. 매사에 맺고 끊는 것도 분명해 뒷얘기가 나오질 않았고, 비굴하거나 나태하지도 않아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불행한 일들은 겹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불행이 슬픔과 고독을 만들어내면 또 다른 불행이 딸꾹질처럼 되풀이됐다. 중앙군이 집결지에 모인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무전으로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가자! 임시정부로 - 충칭으로 보내주마
사령부는 후퇴를 시작했다. 작전상 떨어진 퇴각 명령이었다. 팔로군의 느닷없는 기습으로 전선 자체가 무너져 후퇴가 불가피했다. 다음 전투를 대비하기 위해 속히 전열을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장준하 일행은 끝없이 펼쳐진 콩밭과 조밭을 따라 걸었다. 더위와 흙바람, 배고픔을 안고 또다시 행군에 나섰다. 나직나직한 무덤이 펼쳐진 길을 지나자 눈앞에 고왕탄광이 나타났다. 중국인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착취당하던 곳이었다. 초소에는 일본군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중국군을 본체만체하며 눈을 돌렸다. 중앙군과 팔로군이 싸울 때는 절대로 끼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일본군이 이들의 싸움에 끼어들면 양쪽에서 모두 일본군을 공격하기 때문에 반대로 어부지리를 노렸다. 장준하는 국민정부와 공산당의 분열이 안타까웠다. 일본군을 앞에 두고도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도 처량했다.
장준하 일행은 하루를 더 걸어 쥐 죽은 듯 조용한 마을에 도착했다. 앞쪽에는 강이 흐르고, 뒤쪽에는 노송이 수려하게 군락을 이룬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무관하게 평화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영유했다. 한 번도 군인들이 들어와 전쟁을 일으킨 적는 곳이었다. 사령부는 이 마을 촌장에게 며칠 동안 묵을 것을 청했다. 마을 사람들은 말썽 없이 있으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부대원들은 여러 집에 나뉘어 숙소를 배정받았다. 일행은 사령관 직무대행, 여러 참모들과 함께 같은 숙소에서 여장을 풀었다.
장준하 일행은 마을에서 빈둥빈둥 밥도둑으로 지냈다. 간부들도 전장이 돌아가는 상황만 보고받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장준하는 권태로웠다. 놈팡이처럼 도식하고, 맨송맨송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한 사실을 상기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눌러앉아 중국인들의 싸움에 말려들 수는 없었다. 그는 참모장에게 일본군의 총탄을 피해 산천을 떠돌던 일행에게 베풀어 준 진심 어린 호의에 감사를 표한 뒤 임시정부로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조국 독립의 그날까지 결사 항거를 다짐하고 일본군에서 탈출했던 용기와 의지를 가슴으로 보듬어 달라고 청했다. 참모장은 군소리 없이 바로 허락했다. 충칭으로 걸어가는 6천리 길에는 일본군과 팔로군 관할 지역이 많아 몸조심하라며 허심탄회하게 일행을 걱정해 주었다.
첫 번째 고비 - 걸어야 산다
장준하는 김영록, 홍석훈, 윤경빈, 김준엽과 함께 사령부를 떠나 6천리 대장정에 나섰다.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한국의 모든 국민이 자유를 누리는 해방 세상에 조력하기 위해 드디어 첫발을 뗐다. 일행은 그동안 정들었던 사령부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한 뒤 적들의 눈에 발각될 것을 염려해 저녁노을이 질 무렵 군영에서 벗어났다. 고맙게도 참모장이 장준하 일행에게 지리와 지형에 익숙한 안내인 한 명을 붙였다. 다섯 명이 임시정부에 무사히 도착하길 바라는 염려와 후의였다. 중앙군 조직이 얼마나 탄탄했는지 어느 지점이 되면 안내원이 계속 바뀌었다. 장준하 일행은 새로운 안내원을 만날 때마다 그를 믿고 따랐다.
서쪽 하늘이 유난히 붉게 물들고, 시원한 바람이 산 쪽에서 불어왔다. 장준하 일행은 안내인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내리막길에서는 거의 반달음으로 뛰어가듯 나흘을 행군했다. 쫓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급했다. 하루라도 빨리 충칭에 도착해 겨레의 원분을 풀고 싶었다. 충칭에 가면 김구 주석과 혁명 선배들도 만날 수 있었다. 첫 번째 안내원은 삼촌처럼 자상하고, 학자처럼 총명했다. 마음씨도 좋아 일행들이 안심하도록 배려했다. 자칫하면 자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었지만 피를 나눈 친형제 이상으로 알뜰히 보살폈다. 일행은 어느새 안내원과 깊은 정이 들었다.
장준하 일행이 충칭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첫 고비는 진포선 철도를 건너는 일이었다. 진포선은 일본 침략전쟁의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상징하는 기관시설이었다. 일본군은 전쟁 중 많은 민간인을 강제 징용해 전쟁물자와 군인을 싣고 나르는 철로를 세웠다. 그런 만큼 이곳은 일본군의 경비가 삼엄했다. 한국인인 게 발각되면 그대로 총살이었다. 게다가 진포선 철도 인근은 사방이 확 틔여 몸을 숨길 곳이 많지 않았다. 경비병이 고개를 돌리면 수상한 사람을 금방 발견할 만큼 시야 확보가 용이했다.
안내원은 진포선 철도를 빠져나갈 묘책을 강구하다 중앙군 연락소가 있는 인근 마을에서 사흘을 쉬기로 했다. 사흘 뒤 열리는 장날에 들르는 중국인 주민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마을에 머무르면서 농민처럼 보이기 위한 연습에 돌입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부자연스럽거나 쭈뼛쭈뼛하면 다섯 명의 정체는 탄로 나고 말았다. 총을 들고 싸우면서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대한 독립 만세 한 번 외치지 못한 채 잡혀가 죽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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