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17. 장준하 일대기 04 - 사선을 오가다

이동권 2023. 8. 9. 22:58

홍석훈을 살려라 - 홍동지

장준하 일행은 오랜 행군으로 기진맥진했다. 중간중간 잠시 땅바닥에 누워 힘을 저장하는 것 빼고는 피로를 회복할 방법은 없었다. 일행은 발바닥이 부르트고 장딴지가 단단하게 굳어 갔지만 기계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일본군 관할지역에서 벗어나려면 잠시도 발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일행은 사방에 컴컴한 어둠이 내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골짜기에 들어섰다. 한 줄로 서서 앞사람의 소매를 붙잡고 조심조심 걸음을 뗐다. 일행 중 홍석훈이 갑자기 주저앉듯이 쓰러지더니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술 취한 행인이 길바닥에 쓰러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머리가 푹신한 흙바닥에 부딪쳐 뇌 손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준하는 깜짝 놀라 차갑게 식어 가는 홍석훈의 온몸을 주무르며 흔들어 깨웠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그의 옷을 벗기고 자신의 맨살로 마사지하며 온기를 전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체면도 필요 없었다. 


장준하는 목이 잠기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맑은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한가득 모여 뚝뚝 흘러내렸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는 소리 없는 절규였다. 김영록, 윤경빈도 설움에 복받쳐 흐느꼈다. 나라 잃은 국민이 겪게 되는 슬픔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홍석훈은 게슴츠레 눈을 뜨더니 “더 이상 걸을 수 없다, 먼저 가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체력을 모두 쇠진한 것이었다. 일행은 그를  그대로 놔두고 갈 수 없었다. 세 사람은 그를 번쩍 들어 평평한 곳으로 옮기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장준하는 홍석훈을 바라보며 서정주의 ‘송정 오장 송가’를 떠올렸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원.’ 일제의 자살특공대에 참여한 조선 청년들을 미화화고, 일제의 침략 행위가 마치 숭고하고 값진 것처럼 그려낸 시였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끊어내기 위해 어떤 이들은 목숨을 걸었지만 어떤 이들은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에 동조하며 한국인의 삶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것도 지식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정준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홍석훈을 잃는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생명이 붙어있는 그날까지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그였다. 그는 홍석훈 자신의 임무를 다하도록 돕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다르게 홍석훈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온몸에서 식은땀을 쏟아 내며 기력을 잃어 갔다.

신의 은총 - 물이다

장준하 일행은 지체할 수 없었다.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려면 홍석훈을 부축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다리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일으켜 세우려 해도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털석털석 쓰러졌다. 세 사람은 고된 숨을 몰아쉬며 홍석훈을 들다시피 해 이동했다.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부엉이의 날카로운 발톱에 몸통이 찍힌 채 애처롭게 울고 있는 산비둘기였다. 장준하는 반뜩반뜩 빛나는 부엉이 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신세가 부엉이에게서 도망가려고 애쓰는 산비둘기 같아 구슬프고 처량했다. 일본군에게 잡히는 날에는 저 산비둘기처럼 자신이 온몸이 찢길 게 뻔했다.


비로 만들어진 것 같은 작은 물웅덩이가 나타났다. 장준하 일행은 홍석훈을 잠시 바닥에 뉘어 놓고 탄성을 내지르며 물웅덩이를 향해 뛰었다. 신의 은총을 받는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세 사람은 엎드린 채 웅덩이에 입을 대고 꿀컥거리며 물을 마셨다. 미지근하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물이었지만 약수라도 마신 것처럼 뱃속까지 개운했다. 이들은 수통에도 물을 가득 채워 홍석훈에게도 먹였다. 그는 몸에 물에 들어가자 서서히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몸에 열이 오르고 힘이 빠지는 이상반응이 나타났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배앓이가 시작됐다. 홍석훈도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아까 마셨던 물은 갖가지 오물에 오염된 더러운 물이었다. 장준하 일행은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뒤에야 제정신을 차렸다. 반면 급속도로 허기가 찾아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계속 났다. 홍석훈을 부축하고 다니면서 먹을거리를 찾기는 힘들었다. 장준하는 윤경빈과 함께 식량을 구하기로 하고, 김영록은 홍석훈을 간호하기로 했다.


장준하는 한참을 걷다 낡은 원두막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원두막을 향해 뛰었다. 밭에는 수박이 익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막 영글기 시작한 작은 수박을 주머니마다 채워 넣고, 양팔 가득 수박을 안고 나오다 주인과 마주쳤다. 그러나 주인은 장준하와 윤경빈의 행색을 보더니 놀라 뒷걸음질 치며 도망갔다. 일본 군복차림과 독이 바짝 오른 두 사람에 눈빛에 제압당한 것이었다. 수박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주인이 도둑이나 산짐승을 막가 위해 원두막을 지키곤 했다. 그 밭도 그랬다. 

기적 소리 - 지쳐 잠들다

수박 과즙과 섬유질이 뱃속에 들어가자 허기와 갈증이 동시에 해갈됐다. 설익은 수박 맛이 어떠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입가에 단물이 주르륵 흐르지 않아도, 먹을 게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홍석훈도 수박을 아싹 베어 물더니 혼자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서서히 기운을 차렸다. 


장준하 일행은 속이 완전히 들어차지 않은 새끼 수박을 나눠 들고 먹으면서 걸었다. 수박밭 주인과 마주친 일이 걱정돼 편안히 앉아서 먹을 수 없었다. 일행은 수박을 껍질째 이빨로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껍질을 남기면 추격의 실마리를 줄 수 있었다. 


일행은 배고픔과 목마름에 몸서리를 치다 몸에 수박이 들어가자 졸음이 몰려와 참을 수 없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짓눌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일행은 옥수수밭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안락하고 쾌적한 잠자리는 아니었지만 세상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을 만큼 평안한 곳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이 쫓아온다는 생각조차 잃어버리고 어린아이처럼 곤한 잠에 빠졌다.


금빛 태양이 따사롭게 쏟아졌다. 하늘 위로 날아오른 새는 숙련된 솜씨로 하늘에 그림을 그렸다. 사방이 확 트인 평야에는 신비로운 동화처럼 계절을 잊은 꽃이 아름답게 만발했다. 기모노를 입은 백발의 노인은 그물처럼 뒤엉킨 넝쿨에 물을 주고, 물방울은 나뭇잎 위에 은빛으로 맺혀 오롯이 흔들렸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버섯구름이 일면서 뜨거운 열기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도시와 사람들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숲과 강물은 잿더미로 변했다.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대낮인데도 시커먼 대기가 태양을 가려 발밑을 분간 못할 만큼 어두웠다.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피부가 전부 녹아 흘러내려 괴기스러웠다.


장준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기억에 남는 미몽이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빽빽 울리는 기적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날이 어두워 실체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기차 기적 소리라는 것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장준하는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기적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정신을 쏟았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아야 탈출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진 동지들을 흔들어 깨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도망가는 중국인 - 밤이 되거든 걷자

드문드문 기적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멀어 기차바퀴가 털커덕털커덕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날씨가 조금씩 밝자 검은 연기를 훅훅 내뿜으며 산모퉁이를 달려가는 기차는 어슴푸레 보였다. 


장준하 일행은 벌떡 일어나 신경을 곤두세웠다. 얼굴은 부석부석했지만 눈빛은 사나운 개와 맞닥뜨린 고양이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일본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필사의 탈출이 생사의 고비와 마주했다. 장준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탈출 경로로 잡았던 동북 방향에는 철로가 없었다. 필시 방향을 잘못 잡고 일본군 관할지역을 뺑뺑 돌았던 게 분명했다. 장준하 일행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모았다. 어려움이 거듭될수록 더욱 희망을 잃지 말아야 했고, 차분히 의견을 교환하다 보면 현명한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일행은 옥수수밭에서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리기로 했다. 밤이 되면 걷자고 뜻을 모았다. 날이 밝을 때 움직이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았다. 이제 동이 트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긴긴 기다림으로 배고픔이 극에 달했다. 바닥에 누워 움직임을 줄여도, 희망에 찬 대화를 나눠도, 혀를 차며 일본군의 만행을 열거해도, 한때 가장 좋아했던 시를 읊어도 허기는 잠재울 수 없었다. 


누군가가 옥수수밭으로 걸어왔다. 밭에 거름을 주러 온 농부였다. 농부는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장준하 일행과 눈이 마주치자 줄행랑을 쳤다. 장준하는 일단 중국인 마을로 내려가 배를 채우자고 제안했다. 중국인에게 은신처를 들킨 마당에 그 자리를 지킬 이유는 없었다. 


중국인들은 일본군을 두려워했다. 일본군의 잔인한 ‘인간 사냥’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1937년 일본은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해 중국인 30만명을 학살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자.’는 일본군의 삼광작전이었다. 일본군은 중국인 남자들을 색출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성 외곽이나 장강으로 끌고 가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고, 총검술 훈련용이나 목 베기 시합의 희생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산 채로 파묻어 매장하고, 칼로 난도질하며 무료함을 달래기도 했다. 일본군은 여성들을 집단윤간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가리지 않았다. 일본의 난징대학살은 6주간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