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44. 장준하 일대기 31 -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다

이동권 2023. 9. 1. 01:05

해방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 4당수 회담

4당수가 김구 주석과 국내정치를 논의하기 위해 경교장을 차례대로 방문했다. 장준하는 오랜 시간 동안 회담 내용을 기록하면서 팔이 뻑적지근했다. 붓을 쥔 손아귀도 저렸다. 김구 주석은 회담이 끝난 뒤 장준하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장준하는 회담장에 앉아 4당수 회담을 복기했다. 회담에서 특별한 얘기나 치열한 공방은 없었다. 김 주석은 정치적인 대응에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장준하는 일찍 잠을 청했다. 잠을 자고 나면 머릿속이 맑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잠은 쉬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여도 이런저런 잡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자신이 맡은 일은 회담을 기록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회담 내용이 형식적인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병은 우리 민족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겼다. 하찮은 물건을 부당하게 빼앗기는 것도 화나는 일이었다. 하물며 땅과 주권, 민족의 정기까지 빼앗긴 것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었다. 김구 주석처럼 정의로운 사람에겐 더욱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한일합병 당시 위정자들의 무능,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파, 일진회 등 매국노들의 반역,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묵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수치와 모욕을 넘어선 분심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막상 해방이 되고 나니 조국은 온데간데없이 자기만 중요해져 버렸다. 애국자는 많은 것 같은데 정작 애국의 길은 어느 누구도 걷는 것 같지 않았다. 용기가 필요했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게 중요했다. 항상 정의가 이기지는 못했다. 삼일운동도 조선에 독립을 안겨주지 못했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렸고, 실제 이날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하다못해 친일파 문제라도 명쾌한 결론이 났으면 했다. 해방된 지 3개월이 지나도록 일본 경찰보다 더 악랄했던 고문경찰 하판락(가와모토 마사오) 같은 자들이 살아서 걸어 다녔다. 하판락은 친일경찰 3총사 중 한 명으로 고문귀, 고문왕으로 불렸다. 하판락은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고,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잡아 불구로 만들고, 고문으로 옥사케 했다. 고문 방법은 가리지 않았다. 물고문, 불고문, 전기고문은 기본이었다. 상처가 난 환부를 계속해서 건들거나 죽을 때까지 피를 뽑아내는 착혈 고문도 했다. 하판락은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이승만과 미군정의 비호 아래 석방돼 계속 경찰로 재직했고, 일본인 재산 처리에 관여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자주 국가를 꿈꾼 독립운동가 - 의암 선생 지묘

새벽녘에 진눈깨비가 조금 휘날리기는 했지만 하늘은 푸르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4당수 회담이 끝나고 잔뜩 가라앉은 경교장에 밝은 기운과 운치를 더하는 날씨였다. 때마침 정원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들렸고, 처마에는 밝은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쨍쨍하게 내리비췄다. 


김구 주석 일행은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로 향했다.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단체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했지만 손 선생을 만나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이날 순방에는 삼일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 중 오세창, 권동진 선생이 동행했다. 


오솔길을 따라 우이동 자락을 걸어 올라갔다. 발밑에서 낙엽 밟히는 소리가 와삭하며 들려왔다. 아직까지 나무에 매달린 낙엽은 스산한 바람에 밀려 오소소 떨어졌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은 제 몸을 굴리며 산 아래쪽으로 천천히 흩어졌다. 머리를 식힐 겸 고국산천에 한 번 나가보고 싶었던 장준하에게 더없이 정겨움을 선사하는 시간이었다. 


산길을 시적시적 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둑하게 흙을 쌓아 올린 묘지가 나타났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것으로 봐서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듯싶었다. 김 주석은 꽃다발을 무덤 앞에 내려놓고 머리를 숙여 묵념했다. 오세창, 권동진 선생은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영면한 고인이 안타까웠는지 서럽게 호곡하며 눈물만 흘렸다. 차마 손병희 선생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의암 손병희는 완벽한 자주 국가를 꿈꿔 온 독립운동가였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 중국조차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자력으로 독립하지 못했고 해방과 함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과 함께 관군을 격파하며 서울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피신했다. 이후 최시형과 동학 교세 확장에 힘을 기울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유학생을 도왔다. 그러나 같이 활동하던 이용구가 일진회를 만들고 자신의 이름을 넣은 을사조약 찬동 성명서를 내자 귀국해 진실을 밝히고 친일분자 62명을 천도교에서 출교 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해 민족대표 33인으로 삼일운동을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됐다. 

시가지를 가득 메운 태극기 - 가족생각

김구 주석은 손병희 선생의 묘지 참배 후 서울로 향했다. 또 다른 일정이 겹겹이었다. 


장준하는 산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마주친 사람들 때문에 고향집이 문득 생각났다. 고향을 떠난 지 2년이 넘었는데도 부모 형제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아내와 결혼 2주년 기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함께 교회당에 앉아 있던 모습, 어머니가 생선살을 발라 숟가락 위에 올려주길 바라던 모습, 일본군에 끌려가는 남편을 보면서 담담하게 참아내던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스쳤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전에는 가족 생각에 매몰되는 것을 항상 경계했지만 이따금씩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날 때는 어쩔 수 없었다.


김구 주석이 탄 차가 갑자기 멈췄다. 종암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김 주석이 차를 세웠다. 그는 차에서 성큼 내리더니 학교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장준하도 가족생각을 잊고 김 주석을 따라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김구 주석을 소개하자 아이들이 주석 할아버지를 외치며 그의 다리를 끌어안고 빙 둘러쌌다. 교장은 즉석에서 전체 학생을 운동장에 불러내 전체 조회를 열었다. 단에 오른 김구 주석은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너희의 미래가 곧 조국의 미래이며 너희들이 이 나라의 주인’라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는 선대의 잘못으로 부국강병한 나라를 후대에게 물려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인지 자꾸 끝말을 잇지 못했다.


김구 주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지가 있는 망우리로 향했다. 안창호 선생은 독립협회, 신민회, 흥사단을 조직하고 일제에 저항하며 민족의식 개혁과 계몽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였다. 임시정부에서는 내무총장을 역임했다. 일행은 성묘를 마치고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인들의 모임인 조선기독교남부대회에서 주최하는 환영회에 참석한 뒤 열아홉 개 청년단체가 연합한 독립촉성중앙청년회와 면담했다. 


서울운동장에 서울시민 3만여 명이 모였다.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가 기행렬을 열기로 한 날이었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시민들은 만세를 외치며 광복의 기쁨을 다시 한번 만끽했다. 만세의 의미에는 혼란한 시국을 속히 극복해 나라의 전망을 밝히자는 뜻도 있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군용 무개차를 타고 서울운동장을 빠져나갔다. 인도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기다리던 시민들은 손에 들고 있던 태극기를 흔들었고, 요인들도 손을 흔들며 이들의 환호에 응답했다. 

조국의 비참한 현실 - 헐벗은 아이들

눈보라가 몰아쳤다. 찬바람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거칠게 불었다. 경교장에도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들은 바람이 불면 와르르 무너졌다 쌓이길 반복했다. 거처로 들어가는 통로에 쌓인 눈은 빗자루로 쓸어도 그때뿐이었다. 금세 쌓인 눈에 발모가지가 푹푹 빠졌다. 


경교장에 임시정부 2진 요인들의 입국소식이 전해졌다. 김포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비행기가 기상 악화로 항로를 변경해 옥구비행장에 착륙했다. 전라도 지역도 눈이 내려 교통사정이 좋지 않았고, 결빙 구간도 많았다. 미군은 천막을 뒤집어씌운 군용 트럭에 요인들을 태웠다. 그러나 요인들은 바람이 지독스레 불고 온도가 급강하하자 미군에게 트럭을 타고 움직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차에서 내려버렸다. 


미군 트럭이 멈추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다. 학생들도 지루한 일상에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기웃거렸다. 그런데 학생들은 전부 맨발이었다. 가난에 쪼들려 겨울에도 신발조차 사 신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니 돈이 있어도 사 신을 신발이 없었다. 해방 후 한국은 생산 시설도 낙후했고, 물자도 부족했고, 식량도 귀했다. 일제가 깡그리 다 빼앗아가는 바람에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걸인 같았다. 요인들은 신발을 신고 트럭에 타고 있어도 손발이 시려 견딜 수 없었던 마음을 고쳐먹고 트럭에 올라탔다. 미군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도 없었고, 서울까지 걸어갈 수도 없었다.


요인들은 논산에 도착해 작은 여관방에서 얼얼해진 몸을 녹이며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유성비행장에서 수송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내려 곧바로 경교장으로 향했다. 경교장에는 2진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친지들이 몰려와 장사진을 이뤘다. 


장준하는 뜨거운 함성 소리를 듣고 2진 요인이 도착한 사실을 알았다. 2진 요인들과 가족들은 눈물이 범벅이 돼 서로를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그는 김준엽을 무척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노능서가 ‘시안에서 충칭으로 되돌아간다.’는 김준엽의 전언을 가지고 도착했다. 장준하는 김준엽이 오지 않아 서운했지만 노능서를 만날 수 있어 더없이 반가웠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뜨거운 인사를 나누며 솟구치는 동지애를 나눴다.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는 2진 요인들이 도착하자 경교장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숙소를 따로 마련했다. 장준하는 한미호텔에 개인 숙소를 배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