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여행과 사색

계룡산 - 생기와 약동 넘치는 산

이동권 2022. 8. 30. 23:32

계룡산 동학사


점퍼 안으로 차가운 기운이 파고들었다. 옷깃을 바짝 세워도 지독한 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얼굴을 옷깃에 파묻고, 서울역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산으로 떠나는 마음이 차가운 바람에 위축되면서 자꾸만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찾아왔다. 뭔가를 얻기 위해 떠나는 마음의 병 같기도 했다. 나는 '산으로 향하는 마음은 갈증을 채우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였다.

창 밖으로 어둑어둑해진 태양이 벌겋고 푸르스름한 광경을 연출했다. 네온사인도 하나둘씩 불을 밝히며 도시의 밤을 준비했다. 기차는 정각 7시가 되자 출입문을 닫고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플랫폼은 사막처럼 조용하고 적막했다. 플랫폼에 서있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온데간데없이 모두 사라지고 바퀴질 하는 굉음만 귓가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최윤은 소설 '하나코는 없다'가 생각났다. 누구에게나 기쁨을 주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하나코가 사라지자 어느 누구도 그녀를 궁금해하거나 회상하지 않았던 현대사회의 공허함을 그 순간 느꼈기 때문이다.

밤 9시 대전역에 도착했다. 대전역 앞 대로를 건너 계룡산의 관문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102번 푯말 앞에 섰다. 이 산과는 7년 만의 재회였다. 추억의 깊이가 벌써 한 손가락으로 셈해도 모자랄 정도로 흘러 버렸다. 기억조차 없는 추억의 거품들이 포말처럼 무한정 부풀어 오른다.

계룡산 기슭에 도착했다. 벌써 10시다. 방한용 점퍼를 입고 있어도 입이 덜덜 떨렸다. 나는 예전 기억을 더듬어 커피 자판기를 찾았다. 아직도 그 자리에 커피자판기가 있었다. 커피 맛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세월이 녹아들어서인지 더 진하게 몸을 타고 들어왔다. 차는 삶을 태워 마신다는 말이 맞는 듯했다.

희미한 초생달이 산 밑에 내려 침침하고 고독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둠 속의 산자락은 얼마나 큰 형채가 앞에 있는지 보이지 않아 큰 두려움을 줬다. 추위와 산행의 부담이 집채만큼 커지기 전에 숙소를 찾았다. 조금은 허름해 보이지만, 싸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숙소를 잡았다. 

숙소는 예상대로 싸긴 했지만 주인아주머니의 특유한 장사 기질에 맘이 일그러졌다. "주말이라 좀 비싸요." 지금 이 시간에 누가 또 이 여관에 찾아올까. 세상살이 베푸는 정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아 계룡의 밤은 혼자 공덕을 쌓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다음날 아침 창 밖으로 은빛 품 안에서 용솟음치는 계룡산을 보았다. 깊은 아름다움과 고독의 향취, 무속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산골짜기의 백설은 사람의 마음을 쏙 빼놓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산행을 위해 대충 식사를 청했다. 아침 식사라서 입맛이 없었지만, 긴 산행을 위해 억지로 입에 집어넣었다.

 

계룡산 계곡

매표소는 등산객들로 꽉 차 있었다. 동학사에서 금잔디 고개, 갑사로 넘어가는 코스로 일정을 잡았다. 자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길목에 동학사가 있었다. 비구니들의 강연장으로 널리 알려진 동학사는 상봉 계곡 사이의 우거진 숲길을 1km 정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강원 '동학승가대학'이 있다. 

 

동학사 앞마당에는 능, 묘, 궁궐 등에 세우는 홍상문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동학사에 유신들의 제사를 지내온 것을 미루어 짐작케 했다.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향내 짙은 바람이 불어와 이리저리 묻혀온 세월의 앙금과 티끌을 털어버렸다. 귓가에는 스님들의 간경소리가 들려왔다. 

거친 파도처럼 인생을 표류하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절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세상의 감미로운 욕정과 욕망의 수렁 속에서 헤엄치다 웅크린 맘을 열고 진리를 응시하며 고행의 둥지에 모든 것을 맡긴 이들의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마음속에서 고요한 연정이 휘몰아쳤다. 동학사의 이끼 낀 돌담도, 한 많은 역사를 동고동락한 축대도, 가녀린 바람이 두드리는 종소리도, 간절히 손을 모아 절을 올리는 불자의 가슴도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금잔디 고개를 넘어 갑사로 향했다. 계룡산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가 다녀왔다고 해서 찬미하거나, 남이 좋다 해서 좋은 게 아니라 자세히 하나하나를 바라보면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계룡산은 본디 산수의 심색과 인정에 묻힐 수 있게 하는 넓은 가슴을 지녔다. 싹이 트고 연둣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 같더니 어느새 온갖 생물들을 잉태하는 여름이 되고 황금빛, 울긋불긋한 휘장을 둘러 쓰는 듯하더니 하얀 눈송이들이 만발하는 겨울이 되듯 각양각색의 이미지와 아기자기한 색을 가졌다. 금강산, 설악산과는 분명 다른 매력이었다.

산 아래에 내려오니 마음속까지 얼게 했던 도도한 추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한 공기를 몰고 와 몸을 감샀다. 오후 2시가 다 됐다. 배가 고팠다. 상큼한 야채와 콩가루를 넣어 버무린 깔끔한 도토리묵, 도토리 가루와 달걀로 반죽해서 부쳐내는 파전과 좁쌀 동동 뜬 시원한 동동주 한 사발에 다섯 시간의 여독과 쫓기고 허둥대던 삶의 긴장을 하늘로 날렸다.

여행 시작부터 불길한 예감 때문에 걱정했던 마음은 고작 바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충동질 같은 것이었을까? 자연의 의연한 풍모와 박력을 안고 서울로 향하는 길에서 새로운 삶의 활력을 충전했다.

계룡산의 사계

봄의 계룡산은 박정자 삼거리에서 동학사에 이르는 약 3km 거리의 청량한 등산로가 장관이다. 새색시 입술같이 청초하기 이를 데 없는 벚꽃, 개나리, 진달래가 첫 세상을 산책 나온 연둣빛 잎사귀들과 어울려 잔치를 벌인다. 겨울 내내 얼어붙은 눈과 얼음이 녹아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소리도 일품이다. 

계룡산의 여름은 동학사 시원한 계곡 물소리를 따라 즐기는 산림욕과 톱니바퀴처럼 솟아오른 기암절벽, 푸른색 물감으로 칠한 듯한 천황봉과 삼불봉이 으뜸이다. 또 관음봉과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기암절벽 위를 타고 걷는 기분은 마치 도인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가을이 되면 삼불봉에서 금잔디 고개를 넘어 갑사로 가는 산길을 물들인 단풍과 외진 가을 틈 사이로 핀 들국화들의 윤택한 춤사위가 최고다. 내리쬐는 햇볕과 거친 여름 태풍, 휘몰아치는 장마를 이겨낸 계룡의 자태는 일상의 응어리까지 치유한다.

추운 겨울에는 은선폭포에서 시작해 삼불봉, 남매탑으로 이어지는 설경(雪景)이 등산객들의 최고 벗이다. 절벽에 매달린 고드름과 등산로마다 나뭇가지 위에 개화한 눈꽃이 원시의 설경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