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밥줄이야기 39

007. 숙박업 종사자 - 다른 일처럼 하나의 직업일 뿐이에요

음란하다는 마녀사냥에 시달리는 사람들 밤마다 차가운 어둠이 내려앉은 벽에 기대어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졸면서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홀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아 남몰래 간직한 그들의 아픔을, 이제는 반갑게 맞아들여라. 새벽 2시. 영등포 유흥가 뒤편 골목길에서 시끄러운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넷이었다. 검은색 양복에 짧은 머리,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와 금목걸이. 얼핏 봐도 직장인처럼 보이지 않는 차림새였다. 술에 취한 얼굴로 노랫가락을 늘어놓던 이들은 G모텔로 들어가 아치형 창문을 두세 차례 심하게 두드렸다. 카운터에 앉아 졸고 있는 여인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깜짝 놀라 일어난 그녀는 숙박료를 물어오는 이들에게 5만 원이라고 말했다. “5만 원. 왜 이렇게 비싸 씨발. ..

책/밥줄이야기 2021.04.05

006. 연극배우 - 인간 구실도 못하고 살아요

헝그리 정신으로 무대를 지키는 사람들 연극배우를 고무하는 것은 오로지 밥값만은 아니다. 하지만 밥값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연극배우의 삶을 화려한 무대 위로 한정하지만 이들의 대부분 삶은 무대 아래에 있다. 화려한 무대를 생산하기 위한 노동의 시간이. 밝고 야무진 성격이었지만 눈빛만은 늘 우수에 차 있었던 친구. 그는 술에 취하면 업소에 나가 기타를 연주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심각해지곤 했다. 음악인으로서 빛을 보지 못한 아버지의 꿈은 접어두더라도,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단란주점에 나가 밴드를 했던 당신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훌륭한 배우가 되어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무대에 선지 10년이 지나도 자기 용돈벌이조차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책/밥줄이야기 2021.04.05

005. 누드모델 - 누드가 왜 외설로 보이죠?

발가벗어도 야하지 않은 사람들 오늘도 힘겹게 옷을 벗는다. 연갈색 살갗을 구석구석 바라보는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외면에 지배되지 않는 진실을 믿고 삶 그대로의 모습을 따른다. 이 얼마나 강렬한 동경이며 전투인가. 금방이라도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올 것 같은 소묘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특유의 습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목재 받침대와 패널(Panel)에 눌어붙어 있는 형형색색의 물감, 바닥에 나뒹구는 톰보(Tombow) 4B연 심과 지우개 똥, 물기름이 앉아 반질반질해진 이젤과 고정 핀, 사방에 빙 둘러 설치된 사물함과 그 위에 놓인 석고상.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뒤섞여 나는 냄새였다. 오후의 구름이 걷히고 희끄무레한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자 면이 있는 공간마다 두껍게 쌓여 있는 먼지가 확연하게..

책/밥줄이야기 2021.04.05

004. 무명가수 - 얼굴은 무명이지만 노래는 유명해요

노래가 좋아 부르는 사람들 저 멀리서 흥겨운 트로트 노래가 흘러나오자 웃음을 잃은 노부부가 어깨춤을 들썩인다. 이 노래야말로 슬프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는 명약이로고. 애절한 트로트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사라지는 기관차의 기적소리처럼 노랫가락이 구슬프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돈 벌러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날은 벌거숭이가 된 아카시아 숲과 코스모스 꽃잎이 길가를 뒤덮었고, 밭 한 귀퉁이에 있던 할아버지의 묘지 군데군데가 추위에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음이 울적해진 당신은 웅덩이가 파인 이랑을 건너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요즘도 마음이 쓸쓸해지거나 아들이 보고 싶으면 부르는 노래 ‘찔레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음악을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연예인 중에서도 ‘가수..

책/밥줄이야기 2021.04.05

003. 바텐더 - 바텐더는 날라리가 아니에요

은밀한 미각과 휴식을 선사하는 사람들 삶이란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것이고 스스로 기쁨과 슬픔을 다스리는 치유력도 있지만 가끔은 유쾌하고 탁월한 기교가 필요한 날도 찾아온다. 감미로운 술 한 잔이 그리운 날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도시의 생동감은 곳곳에서 넘쳤다. 하지만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곳에 앉아 피곤한 맘을 달래고 싶었다. 짐짓 사소하고 진부한 이유일지 모르겠다. 자질구레한 것까지 낱낱이 따지고 캐물어야 하는 내 직업이 가끔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면 손가락질하려나. 역시 시시콜콜한 이유다. 어떤 일이든 쉽지 않고, 고단한 노동 없이 풍성한 열매를 딸 수 없다. 하지만 하루 종일 그저 그렇고 그런 기분에 젖어들 때면 술 한 잔 마시면서 털어버리는 게 내 스타일이다. 이래저래..

책/밥줄이야기 2021.04.05

002. 때밀이 - 때밀이라고 말하지 못했어요

벌거벗고 일하는 사람들 고단함을 풀어주는 노동마저 쾌락으로 치부했다면 삶은 얼마나 괴롭고 재미없었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몸을 맡기는 순간에도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동네 목욕탕에서 일하는 때밀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20년 동안 때를 밀면서도 아들에게만은 자신의 직업을 숨기는 한 때밀이의 애환처럼, 타인의 삶에 손가락질하고 얼굴을 찡그리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못난 이웃들을 위해서다. 또 사지가 꽁꽁 묶인 범죄자처럼 차디찬 세상의 이목에 갇혀 사는 때밀이의 삶을 통해 소중한 노동의 의미를 발견해보고자 한다. 나는 때밀이를 만나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때를 밀어봤다. 때를 밀어봐야 때밀이라는 직업을 조금이라도 이..

책/밥줄이야기 2021.04.03

001. 도부 - 우리가 백정이라고요?

소·돼지 잡는 사람들 천년을 살아온 고목의 옹이처럼 천 겹 만 겹으로 맺힌 도부들의 애환을 어찌할거나. 구워진 고기가 한 소쿠리 식탁에 올랐다. 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알싸한 쌈장에 찍어 먹었다. 유명한 음식점에서 파는 일품요리는 아니지만, 지인들과 함께 먹는 고기 한 점에 무거운 일상은 웃음이 됐다. 요즘 고기 생산의 ‘잔인함’에 대해 이맛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다. 가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가축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이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도살장에서 일하는 도부들까지 천하게 생각한다. 많고 많은 직업 중에서 하필이면 동물을 죽여 먹고사느냐고 손가락질을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백정에 대한 천대는 아직도 존재하는 셈이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들조차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이들에게 곁눈..

책/밥줄이야기 2021.04.03

한층 더 성숙한 것을 꿈꾸며

이 책이 나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순수하게 관찰하고 사색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떠한 삶을 살든지 인간의 숙명과 비애를 인내하면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세상에 이름을 빛내거나 기름진 물질을 채우기 위해서도, 나의 나약함을 극복해주는 것에 이끌리거나 추종하면서 안식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삶의 고해와 슬픔을 그저 작은 몸과 가난한 정신 탓으로 돌리며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인 목표나 본능의 욕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인생의 중요한 의미를 그것에 두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처럼 단순하고 고지식한 인생이 어쩌면 더욱 아름다울 ..

책/밥줄이야기 2021.04.03

밥줄이야기 -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우리는 왜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하기 전까지 주의 깊고 진지하게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해 생각하지 못할까. 이제는 삶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불가해하게 뻗쳐 있던 길에 환한 등불이 밝혀지리라. 이 책은 소와 돼지를 잡는 도부를 비롯해 때밀이, 누드모델, 바텐더, 무명가수, 로프공, 트럭노점상, 교도관, 우편배달부, 밴드 마스터, 산불감시원, 무당(무속인) 등 우리 사회의 지독한 편견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책을 낸 이유는 불현듯 삶이 괴롭고, 산다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 우리 이웃의 삶을 둘러보면서 힘을 내기를 원해서였다. 또 사람들의 모진 곁눈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앞날을 열어가는 사람들을 재조명해보고도 싶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

책/밥줄이야기 2021.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