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계곡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대관령에 도착했다. 대관령은 계곡부터, 숲, 농장, 오솔길까지 가는 곳마다 천연의 아름다움으로 넘친다.
구불구불한 대관령 길을 바라보면 ‘숙명’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제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를 가지고 있어도 인간은 모두 똑같은 결말을 맞는다. 날짐승은 날다가 죽고, 기는 짐승은 기다가 죽고, 걷는 짐승은 걷다가 죽는다. 삶이라는 길을 따라 쉼 없이 죽음에 다가서는 것이 생명을 가진 것들의 숙명. 어느 누가 이를 거부할 수 있을까.
가슴을 쫙 펴고 상쾌한 공기를 들여 마시니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각박한 인간사를 달래주는 것은 역시 자연이 최고다.
강원도 옛 대관령길을 오르다 보면 중턱 왕산골에 이색적인 박물관이 있다. 국내 최초의 상업용 커피농장과 커피박물관이 들어선 ‘커피커퍼’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한 커피향과 서구식 건물들이 나를 반긴다. 날씨가 좋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주차장에는 자가용들이 꽉 들어찼다. 입구 쪽에는 단체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지 자그맣게 대형버스 주차장도 구비돼 있다.
한국에는 다양한 박물관이 있다. 웅대한 역사와 예술의 깊이를 자랑하는 국립중앙박물관도 있고, 오감을 자극하는 남도향토음식박물관도 있다. 하지만 이색적인 풍취를 자극하는 커피박물관도 여느 곳 못지않게 특색 있는 공간이다. 특히 다채롭고 섬세한 손놀림으로 빚은 자연 속에서 느끼는 이국적인 청량감은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다.
커피커퍼에는 3만 그루의 커피나무 묘목이 자라는 온실 농장과 커피와 관련된 희귀 유물을 전시한 커피박물관이 있다. 또 관람객들이 직접 커피 맛을 음미할 수 있는 로스팅하우스가 있다.
커피박물관은 1번 전시실부터 5번까지 순서대로 관람해야 한다. 아주 넓고 호사스러운 전시실은 아니지만 이곳을 만든 최금정, 김준영 부부의 정성만큼은 가득하다.
전시실을 돌다보면 커피 하나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던 세계인들의 풍속도 느껴지고, 문득문득 식민지 커피농장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도 떠오른다. 또 이곳에서는 오스마 제국에서 사용하던 로스터부터 진귀한 커피 그라인더 등도 직접 볼 수 있고, 커피와 관련된 인물이나 커피의 역사 같은 정보도 상세하게 배울 수 있다.
커피박물관 옆으로는 커피의 그윽한 향과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아담한 카페가 있다. 이곳에서는 간단한 간식과 커피 관련 제품도 판매된다.
최금정, 김준영 부부는 2000년 제주 여미지 식물원에서 아라비카 커피나무 50그루를 들여와 커피 농사를 지었다. 커피나무는 열대식물로, 15~25도 정도의 온도와 60%의 습도를 유지해줘야 자란다. 커피는 고도가 높고 기온차가 많은 곳에서 자라야 원두가 단단하고 질이 좋다. 커피커퍼가 있는 곳은 대관령 왕산리 계곡 주변으로, 일교차가 크고 습해 커피를 키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피땀으로 일궈진 박물관과 주변 경관을 둘러보니 한없는 감탄사가 입가에 맴돈다. 정갈하고 풍요롭고 호젓하고 고요한 풍광.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생명력 앞에 고요한 감동이 마음속 깊이 스며든다.
한바탕 술렁이는 구름처럼 여행은 끝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인간의 숙명을 어떻게 하면 값지게 채워나갈지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해답을 아마도 커피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제 몸을 녹여 진한 차를 우려내는 커피의 헌신처럼 서로 감싸고 껴안으면서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탐욕과 타락에 짓눌려 공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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