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의 음악은 많은 요소들을 혼합한다. 일정한 음악적 형식이나 이론적인 범주를 넘어 추상적이고 감각적이다. 그의 음악은 우리 전통음악을 정신적 토대에 두고 서구식 음계를 덧붙이는 형식이라 매우 독창적이다. 전 세계가 윤이상의 음악성을 인정하는 이유다. 그의 주 무대였던 베를린에는 윤이상의 이름을 딴 관현악단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국내에서 윤이상이라는 이름은 낯설다. 1967년 7월 중앙정보부(국정원)가 윤이상을 간첩으로 조작하면서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서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윤이상에게 동백림(동베를린)주재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정부가 윤이상을 서독에서 강제로 납치해오는 바람에 서독과 단교 직전까지 가는 심각한 갈등을 낳았다. 그러나 2년 후 윤이상이 석방되면서 외교 분쟁은 무마됐다. 역사는 이 사건을 ‘동백림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후 윤이상은 반체제 친북 인사로 찍혀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그의 위대한 음악혼도 한국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음악도 한국에서 연주되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다. 독일의 유명한 소설가 루이제 린저는 위대한 예술가지만 분단의 상처 앞에 쓰디쓴 눈물을 흘려야 했던 그에게 ‘상처 입은 용’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주기도 했다.
그동안 남북을 오가며 오작교 역할을 해왔던 장용철 윤이상평화재단 상임이사는 윤이상이 평양을 선택한 것은 “동백림 사건이 컸다”고 지적한다.
“윤이상 선생은 한국의 정서, 동양의 사상을 서양음악에 적용했다. 이런 음악을 서양 연주가들이 연주하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런데 동백림 사건으로 남쪽에 못 오니까 평양에 간 거다. 북에서 자신의 음악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해주고, 윤이상음악단을 만들어 직접 연주자를 선발할 수 있도록 해줬다. 윤 선생 입장에서는 남이든, 북이든 모두 우리 민족이니까 북을 선택한 것이다.”
윤이상은 뒤엉킨 남북의 문제를 푸는 열쇠이자 문화교류의 교두보다. 남과 북에서 동시에 인정하는 음악인은 윤이상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북측은 윤이상을 음악가 이전에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일한 운동가로 평가한다. 북측이 그를 민족의 영웅, 최고의 예술가로 부르는 것도 바로 그의 신념과 예술이 주는 힘 때문이다. 장용철 상임이사도 남북 음악교류를 이뤄낼 수 있는 매개로 윤이상은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평가한다.
“윤이상 선생은 ‘고통 있는 곳에 음악으로 다가가서 이야기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음악을 통해 남북의 민족화해를 이뤄보려고 한 것이다. 윤이상 선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의식이었다. 해방 전 일본에서 공부했을 때도 민족의식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남북이 문화예술인 중에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윤이상 선생뿐이다.”
윤이상은 평양에 드나들며 북측 음악가들을 직접 가르쳤다. 그것이 인연이 돼 북한에서는 매년 윤이상 음악회가 열리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윤이상음악당, 윤이상음악연구소, 윤이상관현악단이 만들어졌다. 비록 윤이상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삶은 민족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여러 사람들의 입과 음악으로 부활되고 있다.
남북 음악인이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였다. 남측에서는 황병기 교수를 단장으로 17명의 음악예술인들이 방북했고, 서울 송년 통일음악회에는 북측에서 성동춘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33명이 방남 했다. 이후 여러 번 남북 음악교류가 시도됐으나 무산됐고 1998년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음악회가 두 번째 바통을 이었다. 평양 윤이상음악당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이 음악회에는 남측 음악인 11명이 참여했다.
윤이상평화재단은 2006년 4월 29일 금강산 온정각 금강산문화회관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이 음악회는 재단 설립 1주년을 기념하고 윤이상 선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이 공연을 만드는데 남다른 열정을 쏟았던 장용철 상임이사는 그 당시를 떠올리면 감회가 남다르다.
“음악회 가보면 안다. 그냥 통일만 하면 된다. 아니 되어 있다. 통일이라는 용어 자체도 필요 없다. 북에서 수용할 것도 많다. 전통악기 개량 같은 경우는 우리가 수용하면 음악적 자산으로 충분하다. 북측 연주자들은 연주 실력도 뛰어나다.”
윤이상평화재단은 이 음악회가 남북 문화교류를 더욱 활발히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남측에선 윤이상평화재단, 북측에선 윤이상연구소를 축으로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통해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면서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의 발판이 되길 기원했다.
윤이상 평화재단은 금강산 음악회에 이어 윤이상의 정신과 음악혼을 기리기 위해 2006년 10월 20일 평양 윤이상음악당에서 남북 합동음악회를 개최하려고 했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을 이유로 정명훈 지휘자를 비롯한 남측 음악인들이 참가를 포기하면서 음악회는 취소됐다. 하지만 윤이상 관련 단체 관계자들은 예정대로 방북해 북한 윤이상연구소와 교류했다.
2006년 10월 25일 평양에 도착한 방북단은 ‘윤이상 음악 연구를 위한 토론회’를 갖고 윤이상연구소관현악단의 ‘윤이상 서거 10돌 추모음악회’를 관람하고 돌아왔다. 윤이상을 중심으로 충분한 신뢰를 쌓은 데다 순수한 문화 교류 차원이라는 공감대 속에서 북한 핵 문제와 같이 민감한 사안은 서로 말을 아꼈다.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원하면 민간교류가 진전돼야 한다. 역사의식이 있고, 진정성 있는 통일을 하려면 여야 진보 보수를 떠나서 사회문화교류가 필요하다. 남북은 이기고 지는 경쟁 대상이 아니다. 인도주의적 지원과 사회문화교류 없이 통일이 되면 후유증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08년 10월 16일 다시 남북 음악인이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음악회에서 만났다. 이 공연에는 남측에서 고봉인 첼리스트만 참가했다. 하지만 이후부터 남북 음악교류는 단절되고 말았고 현재까지 답보상태다.
“답답하다. 6.15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줄 알았다. 세상일은 모른다. 하지만 재개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다. 올해 10월에도 평양에서 윤이상음악회가 열린다. 남북교류가 진행되면 참여하고 싶다. 또 윤이상 선생의 음악은 150곡이 넘는다. 그런데 아직 전곡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문화임가공사업 같은 형식을 통해 추진하고 싶다.”
윤이상은 생전에 조국은 하나라고 강조하면서 ‘한 시대의 정치이념은 활엽수와 같으나 민족은 청명과 같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의 길에 뜻을 두고 음악활동을 하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겠다. 지금 이 뜻은 윤이상 평화재단이 이어간다. 재단 이름이 음악재단이 아니라 평화재단인 이유도 다르지 않다.
장용철 상임이사는 음악교류가 민족화해와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심리, 문화, 정서적인 통합 없이는 진정한 통일은 안 된다. 사회문화 교류가 토대가 되지 않으면 통일은 어렵다. 북측에서는 경색된 국면을 풀 때 항상 문화를 열었고, 음악을 이용했다. 북에서는 음악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음악정치라는 용어도 있다. 음악교류는 남북이 가장 손쉽게 손을 잡을 수 있는 매개다.”
남북 음악교류는 2000년 6.15공동선언 이전에는 순수음악교류가 중심이었다. 이후부터는 대중음악 교류 중심으로 전개됐다. 대중음악교류는 남북 모두 환영할 일이었다. 북측은 경제지원을 받는 계기가 됐고, 남측은 정치적 상징성과 시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북 음악교류는 합동공연 형식이 아니라 상호프로그램을 교차 공연하는 형식이어서 한계도 있었다. 앞으로는 좀 더 포괄적이고 깊은 음악교류가 펼쳐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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