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이지승 감독 - 우리 사회 미래를 묻는 영화 공정사회

이동권 2022. 10. 4. 11:19

이지승 감독


영화 공정사회는 ‘아줌마’의 처절한 복수극일까? 영화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공정치 못한 우리 사회의 구조를 얘기한다. 어쩌면 주먹이 가장 쉬운 한국 사회, ‘나’만 중요시하고 소통이나 나눔, 인간성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죄의식 없는 이기利己를 꼬집는다. 자본주의의 과도한 침습은 우리 사회를 기분에 따라 ‘묻지마 살인’까지 벌이는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영화 공정사회는 짜릿하지 않다. 혀를 끌끌 차게 만드는 답답함과 분노가 있을 뿐이고, 만약 그런 상황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했을지 깊은 고민에 빠져들게 했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눈빛으로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아줌마. 우리 사회의 방관과 무관심에 처절한 복수를 단행한 아줌마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이지승 감독은 영화 ‘공정사회’를 통해 인간의 문제를 얘기한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현실이 이렇다’고 경고하기보다는 우리의 미래를 묻는다. 이 감독은 정부의 정책이나 인권의식의 부재, 냉소적인 우리 사회와 이웃들의 실체를 발가벗기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본 당신은 과연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할 것이며, 우리 사회를 좀 더 괜찮은 곳으로 바꿔가기 위해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느냐고 질문한다. 이 차갑고 힘겨운 세상을 초월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감독은 소신도, 주관도 없이 휩쓸리는 ‘냄비근성’을 고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영화에 거대 담론을 담지 않았다. 영화가 법을 바꾸는 시대가 됐으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영화와 같은 일들이 주위에 많이 일어나고 있어서 ‘환기’시키고 싶었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우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잠시 들끓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냄비근성이다.”

영화 공정사회는 ‘도가니’와 ‘돈 크라이 마미’와 같이 아동성폭력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줌마를 통해 딸의 성폭력을 방관하는 우리 사회의 정의를 폭력으로 대신 실현한다. 사람들이 집단으로 몰려들어 살인자를 때려죽이는 미개 사회의 ‘거리의 정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줌마는 혼자서 벌하고, 유유히 익명의 사회로 다시 합류한다.

이지승 감독은 프로듀서 출신이다. 프로듀싱 얘기는 잠시 다음으로 미뤄 두겠다. 이 감독은 해운대, 통증 같은 상업영화의 프로듀싱을 해왔으니 실력만큼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일 것이다. 자세히 봐야 할 것은 감독으로서의 세계관이다. 감독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무척 중요하다. 한 편의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실력이 좀 부족하면 배우면 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내공도 쌓인다. 문제는 세계관이다.

‘아동성폭행’이라는 소재를 선택하고, 공정치 못한 복수로 결말을 이끈 감독의 의중이 궁금하다. 감독이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결말대로라면 이 감독은 혁명을 꿈꾸는 사람 같다. 그가 정의를 실현해낸 작법은 내재된 반골과 전복의 뿌리를 느끼게 한다.

“내 기본적인 취향이다. 결말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을 넘어선 영화적 판타지로 카타르시스를 주고 싶었다. 카타르시스라고 하니까 시원하다, 통쾌하다 그런 거 아니다. 극장을 웃으면서 나가지만 씁쓸한 여운을 주고 싶었다. 오죽하면 이 방법을 택했을까, 사회에 순응하려고 노력하는 아줌마가 형사에게 부탁하고, 남편에게 부탁하다 안 되니까 오죽하면.”

이 영화는 이 감독의 얘기처럼 씁쓸했다. 영화적 상상력도 필요치 않았다. 그렇다고 현실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아줌마의 행동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또 아줌마가 그렇게 변해야 하는 사실이 굉장히 서글프고 애달팠다. 아줌마의 행동은 과거의 확신을 완전히 뒤엎는, 영화의 주제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반전으로 끝을 맺는다. 거기에서 기자는 공정사회에 대한 이 감독의 염원을 보았다. 하지만 공정사회는 사회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재설계와 인간들의 전향적인 인식전환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게 변해버린 우리 사회의 감성을 일깨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감독은 “영화를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문제였다”며 “모든 사람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 감독이 관객들에게 던진 고갱이는 아마도 ‘이타심’인 것 같다. 나보다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기본이 돼야 모두가 잘 사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아픔을 나누는 마음이 소중하다. 이지승 감독이 얘기하는 공정사회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그는 엔딩에서 아줌마의 뒷모습만 보여준다.

“엔딩에서 아줌마의 앞모습을 못 넣겠더라. 아줌마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넣었다면 영화적으로는 더 좋았겠지만 감독인 내가 앞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 영화의 모든 일들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영화 공정사회는 상업적, 대중적인 요구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제작비 5000만원, 9회밖에 촬영하지 않은 독립영화다. 하지만 요구와 조건이 어떻든 첫 입봉을 압둔 감독들은 작품에 고심이 많다. ‘처음’에 어떤 평판을 받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감독은 처녀작으로 민감한 소재를 선택했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지 눈에 보인다.

“처해진 상황 탓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예산도 부족하고, 촬영 횟수도 한정돼 있어서 짧은 기간에 최대한 많은 것을 준비하려고 했다. 일반 영화 같으면 진중하고 여유롭게 작업했겠지만 이 영화는 달랐다. 내가 만약 이 영화를 평하면, 정말 ‘옥에 티’가 많은 영화라고 하고 싶다. 비약도, 논리도 어긋난 장면이 있다. 하지만 보는 사람들이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내가 말하는 뜻을 받아줬다. 고마울 따름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공정사회인데, 그 밑에 영어로 아줌마가 붙는다. 이질적인 두 단어가 한글과 영문으로 적혀 있어서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공정한 사회와 아줌마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아줌마라고 하면 자기밖에 모르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는 사람이 연상된다. 그런데 이 감독은 아줌마라는 단어를 큼지막하게 제목에 붙여놓았다.

“이 영화에서 얘기하는 아줌마는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기 위해 몸을 던지는 아줌마가 아니다. 옆집에 사는 여성, 아줌마라고 불리는 평범함 여성을 말한다. 영화 제목에 아줌마를 넣은 이유는 우리 시대의 영화가 여성을 상당히 왜곡되게 표현해와서다. 그것을 바로잡고 싶었고 해외에도 알리고 싶었다. 한국의 고유한 단어에 아줌마가 있고, 한국의 아줌마가 얼마나 강인한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영화에 출연한 아역배우의 인권도 생각했다.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리얼한 촬영을 거부하고 요령껏 ‘성폭행’ 장면을 완성했다. 이를 테면 아이에게 안대를 씌워 범인을 못 보게 하고, 아이 따로 성인 연기자 따로 영화를 찍는 식이다. 아이에게 끼칠지 모를 아주 작은 슬픔마저 차단하기 위한 그의 감성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