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오봉옥 시인,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 부끄럽지 않은 자리에 서 있어라

이동권 2022. 10. 4. 10:45

오봉옥 시인,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시집 ‘달팽이가 사는 법’은 오봉옥 시인의 시들을 황송문 선생이 고르고 해설한 책이다. 이 시집을 읽고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을지 알았는데, 맘이 편치 않았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들이 평생 걱정과 불안을 어깨에 얹어놓고 살아가는 모습이 떠올라서다. 같은 이유로 달팽이는 오봉옥 시인의 모습과 겹쳤다. 1990년 오 시인은 1930년대 항일투쟁시기부터 1946년 10월 항쟁(대구폭동)까지의 민족운동사를 형상화한 시집 ‘붉은 산 검은피’를 발표한 뒤 국가보안법으로 옥고를 치렀다. 빨갱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살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도 달팽이집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시집 ‘붉은산 검은피’는 남영동 대공분실 1층에 간첩자료와 함께 전시돼 있다. ‘붉은 산 검은 피’가 간첩자료라면 오봉옥 시인은 여전히 간첩이라는 말일 텐데, 정말 지긋지긋하고 버거운 짐이다. 공안당국은 오 시인을 잡아갈 당시 ‘붉은 산’은 김일성을, ‘검은 피’는 혁명전사의 피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산이 붉어서 붉은 산이요, 화순 탄광촌을 다룬 시여서 검은 피라고 쓴 것을 항변했지만 철저하게 묵살됐다.

나도 한 때는 눈물 많은 짐승이었다. 이슬 한 방울도 누군가의 눈물인 것 같아 쉬이 핥지 못했다. 하지만 난 햇살이 떠오르면 숨어야만 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어둠 속에 갇혀 홀로 세상을 그려야 하고, 때론 고개를 파묻고 깊숙이 울어야만 한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그런 천형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등에 진 집이 너무도 무겁다. 음지에서, 뒤편에서 몰래 몰래 움직이다 보면 괜시리 서럽다는 생각이 들고, 괜시리 또 세상에 복수하고 싶어진다. 난 지금 폐허를 만들고 싶어 당신들의 풋풋한 살을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
- 달팽이가 사는 법

달팽이는 외유내강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동물이다. 작고 연약한 몸에 걸음걸이가 느려 마뜩잖아 보이지만 집 없는 서민들이 부러워할 집 한 채를 날 때부터 뒤집어쓰고 다니니 얼마나 힘이 장사인가. 하지만 그 강함은 달팽이에게 괴로움일 수 있다. 달팽이 입장에서는 집을 평생 짐처럼 이고 다녀야하는데다 부서지기 쉬워 평생을 조심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괴로움과 먹먹함에도 달팽이는 씩씩하고 꿋꿋하다. 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길을 걸어간다. 딱 오봉옥 시인의 삶이다.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니지만 두 눈망울을 세우고 가열하게 풀잎을 미끄러지는 모습이 그와 닮았다.

시는 시인의 심상을 투영한다. 오봉옥 시인의 시를 보면 거칠고 고단한 삶이 엿보이고, 이것을 맑은 가벼움으로 변용해내는 여유도 느껴진다. 오 시인은 시를 “인간의 삶”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삶을 반영한 것이 시”라면서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에서 발을 떼 버리면 의미 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철저하게 현실에서 출발해야 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시의 의미를 설명했다.

오 시인은 1985년 창비 ‘16인 신작시집’에 ‘내 울타리 안에서’ 외 7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대표 시집으로는 해방 전후 좌익 활동을 그린 ‘지리산 갈대꽃’과 서사시 ‘붉은산 검은피’, ‘나 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노랑’ 등의 시집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변한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사상의 방향성대로 변해간다. 열정 또한 달라진다. 오돌토돌한 돌멩이도 시간 앞에서 깎이고 다듬어져 부드러운 살갗을 드러내듯이 사회 변혁에 대한 열정도 세월의 깊이를 더하면 인간을 한층 더 품에 아우르는 시어를 만들어낸다. 오봉옥 시인의 시어들도 그러한 과정을 겪어 지금에 왔다.

그는 ‘지리산 갈대꽃’, ‘붉은산 검은피’에서 시대의 역사와 민중의 이야기를 사실적이고 강렬한 언어로 투척했다. 이후 작품부터는 인간과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다채로운 시어를 선보였다. 아울러 깊은 사색과 구체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 시류에 휩쓸리거나 함몰되지 않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오 시인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 예를 들면 시집 노랑에서는 사교육 현장에 내몰린 아이들의 일상을 동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냈고, 죽음의 무거움을 노랑이라는 밝은 이미지로 환치해 보여주기도 했다. 현실에 끈질기게 매달리지만 형식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오봉옥 시인의 시는 3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 변화는 ‘역사 알리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게 됐다는 것이고, 두 번째 변화는 ‘시어의 선택’이다.

“80년대는 알리기 위한 시를 썼다. 시대의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리얼하게 표현했고, 한 시대의 본질과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데 관심을 가졌다. 그만큼 역사가 왜곡됐고, 편향된 역사의식을 강요한 시절이었다. 첫 시집에서는 빨치산 가족사를 다뤘다. 그때는 6.25가 현실의 문제였다. 지금 세대는 아니겠지만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시대의 현실은 우리의 역사였다. 한 동네가 같은 날 몰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두 번째 시집은 필화를 겪었다. 1930년대부터 1980년까지 한국의 역사를 서사시로 그려내려고 했다. 계획은 10권이었는데 2권을 쓰고 구속이 됐다. 그래서 1946년까지 밖에 쓰지 못했다. 1948년 남한 정부가 생겼다. 남한 정부가 생기기 전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당국은 좌파운동을 다뤘다고 나를 잡아갔다. 이후에는 ‘나 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노랑’ 등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 처음 시를 쓸 때는 격정적인 언어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지만 나이가 들수록 뭔가 승화시켜 토해져 나온 언어를 사용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방언에 대한 집착이다.”

오봉옥 시인은 80~90년대 활동했던 시인 중에서 가장 방언을 많은 쓰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시어사전에 오 시인의 시어가 가장 많이 실렸다.

“방언을 지켜야 한다. 표준어라는 게 서울 중산층이 쓰는 언어라는데 얼마나 웃기냐.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와 같다. 일본도 표준어를 동경 중산층에서 쓰는 언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일본은 동경의 언어를 지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동경 외곽의 언어는 쌍스러운 언어를 많이 쓴다. 하지만 한국의 지방에서 쓰는 단어는 아름답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서울은 한자가 많다. 국어사전을 보면 한자가 70%다. 고유어는 10%다, 외래어가 20%로 더 많다. 기가 막힌다.”

방언에 대한 그의 집착은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의 기여로 이어졌다. 겨레말큰사전은 남과 북의 학자들이 2005년 2월 통일을 대비해 우리말을 통일해야 한다는 데 중지를 모으고 집필에 들어간 국어사전이다. 2007년 관련법 시행으로 정부에서 재정 지원을 받아 2013년 발간 예정이었다. 하지만 천안함 사건 이후 편찬사업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겨레말큰사전은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을 만나서 통일사업의 초석으로 사전편찬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합의한 사항이어서 작업을 계속해왔다. 우리도 특별 기구를 만들어 정부사업으로 진행했다. 사전편찬작업을 하면서 북한도 자극을 받았다. 북한은 문화어를 쓰면서 방언이 사라졌다. 북한이 우리를 만나면서 방언의 중요함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천안함 사건 이후 교류가 끊어졌다. 그전에는 수십 차례 만나면서 사전편찬작업을 해왔다.”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건재하다. 많은 활동가와 예술인들이 공안의 끼어 맞추기식 수사로 많이들 잡혀갔다. 당국은 연행과 구금, 고문과 조작으로 민주세력을 옭아맸고, 자기검열을 강요했다. 최근에도 평범한 시민을 간첩으로 둔갑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국민을 분열시키는 색깔공세를 마치 장삿속으로 여기는 새누리당과 수구세력들의 행태다.

한때 국보법은 폐지의 끝에 다 이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이 일을 해내지 못했다. ‘붉은산 검은피’로 필화를 당한 오 시인은 그 당시 굉장히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하면서 겁을 주려고 물은 틀더라. 머릿속에 박종철, 김근태가 떠오르니 얼마나 겁이 나겠냐. 잠도 안 재우고, 정말 많이 맞았다. 그때 실천문학사 이문구 사장(소설가)과 송기원 주간(소설가)이 함께 잡혀갔다. 나는 두 사람이 문단 선배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모른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더 많이 맞았다. 결국 이문구 사장은 석방되고, 송기원 주간은 같이 구속됐다. 내가 모른다고 버티고 있으니까 옆방에서 편지가 오더라. 송기원 주간이 쓴 편지였다. 서로 안다고 얘기를 했으니 안다고 얘기하라고.”

‘붉은산 검은피’ 필화는 한 편의 코미디였다. 이 시집의 원제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정도상 소설가가 ‘붉은산 검은피’를 오 시인에게 제안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공안당국은 그를 간첩으로 몰았다. 모든 것을 북한과 연결시켰다. 오 시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옆에서 지켜도 봤지만 직접 당하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내 스스로를 규제하게 된다. 내 작품을 나도 모르게 검열하고 있다. 이것이 버릇이 됐다. 이만큼 비참한 게 어디에 있냐. 작가는 맘껏 자신의 상상력을 표현해야 한다. 이렇게 표현에 제약이 따르는데 노벨문학상이 나오겠냐. 한 번은 서울에 온 어린 왕자라는 동화를 쓰다 말았다. 어린 왕자가 서울을 구경하다가 바닷가로 가서 물속 생태계를 구경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바다에는 철조망이 없다. 남과 북을 맘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쓰다가 멈췄다. 국가보안법 야만적인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법이 국가보안법이다.”

오봉옥 시인의 고향은 광주다.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남도 화순이다. 탄광촌은 시커멓다. 고된 노동만큼이나 일도 거칠고 입도 거칠다. 막장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여러 사고도 있었고, 기침을 하는 어르신들도 많았다. 작위적이지도 현학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복잡하거나 요란스럽지도 않은 노동현장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전남지역 빨치산의 최대 본거지가 됐다. 이곳의 얘기가 검은 산 붉은 피에 담겨있다. 19446년 8월 15일은 해방 1주년이 되는 날이다. 화순탄광 노동자 1500여 명은 광주에서 열린 광복절 1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오던 중 미군정이 쏜 총에 맞아 많은 사람들이 사상했다. 이 사건은 해방 이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자행한 최초의 민간인 학살이었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미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인식되게 됐다.

우리 민족은 참으로 한이 많다. 일제강점기와 냉전, 전쟁과 굶주림 등으로 비참한 세월을 인고해 왔다. 이런 상처를 안고 있는 민족의 아픔을 국보법은 지독한 야만으로 이어오고 있다.

이야기의 대상에는 사연이 존재한다. 인간 내면의 이야기들을, 기층민의 소박한 생활을, 치열한 현장의 이야기 등을 담아내 시가 되고 소설이 된다. 이러한 문학작품들은 무기력한 영혼에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하고,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 독자들의 답답함을 해소하고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생각만 해도 보통일이 아니다. 작가라는 직업은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특별한 솜씨나 재능이 있어야 가능하다. 오봉옥 시인은 언제부터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어떻게 시인이 됐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막 올라갔을 때 국어 선생님이 전교생에게 글을 쓰게 했다. 그중에서 2~3편을 뽑아서 교지에 실었다. 그때 선생님이 내 시를 뽑아서 칭찬을 해줬다. 그리고는 백일장만 있으면 나가라고 했다. 선생님의 칭찬이 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이후 오 시인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됐다. 오월시 동인의 영향도 받았다. 문단에 등단할 때 다룬 이야기도 오월 광주였다. 여담이지만 5.18 광주항쟁에서는 총을 들고 싸운 유일한 문인이 바로 오봉옥 시인이다. 그는 현재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와 문예지 ‘문학의 오늘’ 편집인을 맡으면서 지식인과 문학의 역할을 가르친다.

젊음이라는 이름은 아름답다. 여느 꽃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만큼 치열하고 치명적인 자아도 없다. 오 시인 또한 치열한 젊음을 보내왔다. 하지만 오늘날은 과거와 양상이 너무도 다르다. 스펙에 매몰된 청춘들, 좌표를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너무도 많다.

“요즘 청년들은 시대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시대에 놓여있다. 이 시대를 바로 보지 못하면 그 시대를 이겨낼 수 없다. 시인도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 종합적인 사고와 능력을 배양해야 어떤 직장에서도 중심에 설 수 있다. 현실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 또 스펙보다는 창의적인 인간이 돼야 한다. 뛰어난 직원은 창의적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돋보이고 진보적이다. 맡은 일도 잘한다. 자격증, 스펙을 따지는 시대는 지나고 있다. 대기업도 스펙만으로 안 뽑는다고 한다. 얼마 전 삼성 관계자를 만났는데 고민이 많더라. 10명을 뽑으면 1명이 9명의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사상’이다.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움직이고,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매진하게 만드는 것은 사상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사상이 없다. 공부 잘하고, 취직 잘하고, 잘 사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이들의 율법처럼 돼 버렸다. 오 시인은 이점을 다시 한번 힘주어 강조한다.

“항상 좋은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당당하고 부끄럽지 않은 자리에 서 있어라.”

오 시인은 화초를 잘 키운다. 아무리 바쁘고 멀리 있어도 화초를 죽이지 않는다. 그는 “나한테 들어온 화초는 한 번도 죽이지 않았다”고 장담한다. 서울디지털대학교 사무실 주위를 둘러보니 7~8년은 족히 됨직한 화초들이 즐비하다. 특유의 성실함과 애정이 만들어낸 결과다. 오봉옥 시인이 왜 그러는지 아는 젊은이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화초를 죽이지 않는 마음. 그것을 알게 될 때 마음으로만 그립고 사무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게 될 것이다. 행동하지 않은 마음은 죽음과 같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