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정상곤 화가, 동서울대 교수 - 결핍된 풍경에서 읽어낸 인생의 허무함

이동권 2022. 10. 3. 22:53

정상곤 화가, 동서울대 교수


살아 숨 쉬며 꿈틀거리는 뭔가가 느껴진다. 자아 혹은 우리 사회의 모습이 얇은 표피 위에서 미끄러진다. 아련하고 몽환적인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메마르고 거칠지만 뜨겁고 감미로운 정상곤 작가의 작품들. 그런데 왠지 맘이 후련하지 않다. 

 

그는 참 사색적이고 지적이다. 반면 그의 작품은 무척 ‘야성적’이다. 야성이란 순박하고 기교가 많지 않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뭔가를 갈구하는 것처럼 보이고,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정상곤 작가의 작품은 경계가 없다. 장식도 없다. 여느 풍경화와는 다르게 거칠고 추상적인 부분이 많다. 붓이 지나가고, 색채가 얹어지고, 덩어리가 만들어지면서 화면을 채운다. 미개 상태의 혼돈과 사유의 깊이가 엿보인다.

그의 작품은 우리 사회와 개인의 극단적인 모순과 혼란을 보여주는 것 같다. 흐느적거리는 화면, 흘러내리는 듯 눅눅하고 끈적거리는 분위기, 전제적으로는 선명한 느낌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극렬한 대립이 소통과 사랑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보여준다. 마구 뒤섞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카오스들이 멀리, 아주 멀리에서 보면 멋진 풍경이 된다.

8년 만이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다. 그동안 화풍도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디지털에서 페인팅으로의 전환이다. 그는 그동안 사회성 짙은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이를 테면 인간의 문제, 사람이 사는 문제를 보편적으로 풀어내면서 관람객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미지로 ‘정상곤표’ 화풍을 구축해왔다. 디지털을 이용해 자신의 감성을 맘껏 담아냈다. 하지만 그에게는 소통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라고 웃어버렸지만 행간에서 그것이 느껴진다.

5년 전부터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페인팅 작품을 요구하고, 이에 부응하듯 끌려 지금에 이르렀다고. 아무래도 사람들은 디지털보다는 페인팅을 좋아하고, 관심도 많다.

Skin deep-Minuscape는 여러 겹의 디지털 이미지들을 다양하게 조합해 만든 풍경 연작이다. 여기에서 ‘Minuscape’는 ‘결핍의 풍경’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작가가 직접 만들었다.

 

그는 “이미지와 종이와의 만남, 텍스처, 혹은 잉크의 번짐, 가벼운 압력, 얇고 가벼운 종이의 주름” 등의 작용을 통해 결핍이라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가 표현하려고 했던 ‘결핍의 풍경’이란 무엇일까. 이미지 레이어가 삭제되면서 뭔가 부족해 보이는 풍경의 결핍?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자연과 동물, 인간의 교감을 부르짖고, 땅에 떨어진 생명의 가치를 얘기했다. 이미지를 지우거나 흐릿하게 보여주는 것은 시시각각 자본과 폭력의 노예로 둔갑하는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그것을 이겨내고 지켜내려는 인간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상곤 작가의 작품은 결핍돼 가는 생명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뉘앙스다. 어떤 감성으로 보고 느끼느냐가 중요하다. 이 작품은 덧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크 미술과 연결돼 있다. 바로크 작품들은 컬러풀하고 화려하지만 반면에 인생의 허무감을 일깨워준다.”

그의 얘기가 가슴에 와닿는다. 파괴되고 흐릿해 보이는 이미지에서 인간의 그늘이 보인다. 우리는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를 원하면서도 그것을 이뤄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복과 주장을 위해서만 내달리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정상곤 작가는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화단에 소개되기 시작해 1998년 탈린 국제판화 트리엔날레와 1999년 류블랴나 국제판화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