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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일 - 헛된 욕망의 끝을 보여주는 찰나의 에피소드, 정이삭 감독 2012년작

이동권 2022. 10. 2. 21:05

아비가일(Abigail Harm), 정이삭 감독 2012년작


살다가 마음이 몹시 상할 때가 있다. 하고 싶은 대로 일이 되지 않거나 뭔가 무리한 것을 욕망할 때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항상 처절한 고뇌의 시간이 기다린다. 보통은 사람이나 사랑, 여러 상황들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영화 '아비가일'은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고통의 원인을 제시한다.

우리는 특별하게 그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는데도 욕망을 멈추지 못한다. 끝 간 데를 알 수 없이 질주하고, 그것이 좌절되면 분노부터 해버린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만심에 차 있었는지 발견하지 못한 채 원인을 다른 것에서 찾기 바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이유를 '나'에서 찾는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거나 중심을 잡지 못하면 고요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도, 아주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발견해내는 지혜도 포기해야 한다고.

'아비가일'은 미국계 한국인 정이삭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이 영화는 한국의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소재로 차용한 영화로, 동화와는 사뭇 다른 스토리로 전개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토리의 평이성과 영상의 실험성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호평을 끌어내기는 힘든 작품이다. 반대로 영화에서 좀 더 특이한 매력이나 예술성을 발견하길 원하는 관객들에게는 즐거운 경험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정이삭 감독은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던 윤여정 배우가 출연한 영화 미나리를 만든 연출가다. 

정이삭 감독은 왜 주인공의 이름을 '아비가일'이라고 설정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지독한 역설로 주제의식을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비가일은 성경에 나오는 여인이다. 분별력이 뛰어나고 영리해 남편 나발의 집안을 구한 며느리다. 아비가일의 지혜는 단순히 집안의 재앙을 막는데 그치지 않는다. 다윗이 군왕이 될 때까지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못하도록 지력을 발휘한다.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여성 가운데 가장 빼어난 지혜와 말솜씨를 가진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 아비가일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장애인과 노인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외롭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이다. 어느 날 아비가일에게 낮선 사람이 나타나 소원을 물어온다. 그리고 그는 아비가일에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폐허가 된 어느 건물에서 한 남자가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옷을 훔치면 그 남자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영화의 한 장면


아비가일은 그 낯선 남자의 말대로 따른 끝에, 젊은 남자와 동거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의 동거가 어떻게 끝날지를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동화 '선녀와 나무꾼'에서는 나무꾼과 선녀가 결혼해 아들딸을 낳으면서 잘 살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하룻밤 꿈처럼 '허상'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스토리 전개도 소소한 꿈처럼 몽환적으로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이것 또한 지독한 역설이다.

영상은 매우 정적이다. 하지만 감독의 광적인 상상력이 더해 관객들의 감수성을 매료시키는 뭔가가 발견된다. 특별한 것보다 오히려 아주 일상적인 것이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과 비슷하다. 바람과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특별하지는 않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서로가 뒤엉키면서 신묘한 사운드가 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헛된 욕망 앞에서 얼마나 자신이 멍청하고 둔한 사람이었는지 느낀 것일까. 결국 아비가일은 고통스럽게 절규한다.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없이 욕망을 채우기 위한 만남이 얼마나 삭막하고 쓸쓸한 결과를 낳게 하는지 깨달은 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