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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왕이 된 남자 - 우리 사회 리더에게 바란다, 추창민 감독 2012년작

이동권 2022. 9. 29. 20:41

광해, 왕이 된 남자, 추창민 감독 2012년작


착하다. 배우들도, 스토리도 훈훈하다. 근데 이 영화는 왠지 진부하다. 훈훈한데 현실적이지 않다. 제아무리 포장해도 ‘한낱 사람이 하는 일’로 보인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진정한 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지만 나는 정말 그러기 싫다.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밥상을 뒤엎는 광해군에게 더욱 매료가 된다. 파국으로 치닫는 광해군의 악행을 보면서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라고 배우는 게 더 좋다. 그러면 너무 나쁜 영화가 되려나.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왕의 롤모델’을 투척한다. 사대부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정치나 외교보다는 오직 백성들과 핍박받는 주위 사람들을 위해 말과 행동을 마구 내던진다. 일면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왠지 모르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봤을지언정 기억에는 남지 않을 것 같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짜릿한 ‘공감’이나 가슴 촉촉한 ‘위로’를 줄 때야 비로소 뇌리에 저장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저 재밌다.

일단 이 영화는 광해군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모두 잊고 봐야 한다. 역사 속의 광해군을 기억하는 순간 머릿속에는 ‘왜지?’라는 물음이 떠나질 않는다. 광해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왕이다. 그를 영화 속에 밀어 넣었다면 가상이 아니라 더욱더 스펙터클한 진실을 꺼내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혀 가당치 않은 설정을 차용했다.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에서나 있을법한 코드다. 차라리 범인을 잡기 위해 여장을 하고 적진에 뛰어든 빅마마 하우스의 ‘마틴 로렌스’가 더욱 설득력 있다. 그래. 영화 속 광해군은 ‘상상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보자.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진지하게 영화를 보는 내내 맥이 푹 빠져버린다.

이 영화는 감정 폭이 좁다. 광대가 왕이 되고, 왕이 되서 좋은 왕이 되고, 끝내 가짜 왕으로 밝혀지는 과정이 숨을 조이게 만들지 않는다. 흐르다 보면 이야기가 전개되고, 전개하다 보면 끝난다. 소름 끼치는 악도 없다. 사대주의와 사리야욕에 빠진 양반들과 백성들을 옥죄는 탐관오리들의 난행, 그리고 가짜왕의 마음에 감복한 그 착한 신하들. 긴장감 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없지는 않다. 최고는 역시 이병헌의 연기다. 왕과 저작거리 광대를 넘나드는 이병헌의 연기력은 혀를 내두를만하다. 아무렇게나 살던 남자가 왕이 되면서 벌이는 갖가지 해프닝은 실소를 금하지 못하게 한다. 근데 그게 그저 작은 웃음이다. 소소한 재미는 있다. 유머와 재치, 비꼬는 말투가 대부분 재미를 주지만 때론 진실이 더 웃기는 경우가 있다. 한껏 분노를 토해내다 문득 발견하게 되는 진실 앞에 발가벗겨지는 느낌. 이것이야 말로 영화적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매개다.

중전 옷을 곱게 차려입고 눈물을 흘리는 한효주의 등장은 동이와 겹친다. 근데 감독은 왜 한효주를 전면에 등장시키지 않았을까. 이병헌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효주는 조연 같은 주연이다. 영화 속 장악력이 조내관보다 못하다. 인물이 아깝다.

이 영화는 넘치지 않는다. 시쳇말로 오버를 하지 않는다. 끌어 오르다가도 숨을 죽이고 기운이 빠질 것 같다가도 끈질기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감동을 반감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영화를 안전하고 완성도 높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뜻이 훌륭하다. 가짜왕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도부장과 가짜왕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하는 허균. 그것이 바로 무엇이겠는가. 거기에는 욕망이 없다. 욕망이 멈추고 진정 따뜻한 마음이 있다. 또 빈부의 격차도, 신분의 차별도 없고, 삶의 척도도 물질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감독이 이 세상에 꺼내고 싶은 이야기이자 그가 바라는 유토피아 아닌가.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굴러가는 사회. 또한 그가 우리 사회의 리더에게 진정 바라는 것.

그래서일까. 영화가 끝난 뒤 수많은 대통령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