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김리혜 재일무용인 - 내 안의 일본 부정하지 않고 한국춤으로 승화시키고 싶다

이동권 2022. 9. 30. 14:19

김리혜 재일무용인


허공을 가르는 하얀 춤사위가 어깨에서 미끄러져 흘러내릴 것처럼 우아하고 곱다. 수평선 위에 떠올라 둥글게 빛나면서 불그레하고 섬세한 선을 그리는 검붉은 태양처럼 격렬하고 강렬한 춤사위가 몇 번이나 사그라들다 솟구쳐 오르기를 반복한다. 차츰 라일락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금세 쓰러질 것 같다가도 저 멀리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갈매기의 날갯짓처럼 몸을 한가득 펼치며 마지막 열정을 쏟아낸다. 이윽고 다시 춤사위는 순간과 순간을 오가면서 굶주린 듯 아름다움을 빨아들이고, 술에 취한 듯 어두운 것을 토해내며 육체를 에워싸고 있는 장막을 하나씩 걷어낸다. “춤은 자신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예술”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자신을 응시하며 서있는 하나의 상을 향해 아찔하고도 예민한 고해성사에 몸을 맡긴다.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아름다운 예술가, 김리혜 선생. 조국과 포옹했던 따뜻한 가슴과 조국에 남겨둔 훌륭한 작품에서 그녀의 예술혼은 영원히 불타 오르리라.

“엄마, 발레 배우고 싶어요”

어린 김리혜 선생이 엄마에게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조르는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아주 어려서 일본에 건너갔기 때문에 재일교포 2세이지만 3세에 가까웠던 그녀는 몸이 약해 병원에 다니는 어머니와 언니, 오빠가 학교에 가면 늘 혼자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외로움이 느껴질 때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유치원에 들려, 또래 친구들이 무용하는 모습을 창밖에서 들여다보면서 홀로 발레리나의 꿈을 키웠다. “그 당시에 유치원에서 흘러나왔던 음악, 춤 동작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김리혜 선생의 아버지는 일본 언론계에서 일했다. 해방 직후 재일동포 사회가 ‘총련’과 ‘민단’으로 나뉘기 전에는 청년단체에서 중요한 요직을 맡았다. 하지만 집은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 있어 한국 생활을 경험하기 힘들었다. 가끔 아버지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 한국말을 하고, 시를 읽고, 노래를 부를 때에만 ‘한국’을 경험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의식적으로만 ‘내 조국은 한국’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김 선생은 “부모님은 가끔 부부싸움할 때 한국말을 하셨고, 명절날이 되면 한국 음식을 파는 슈퍼에 들린 것 빼고는 어릴 적 한국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해 동경으로 이사 간 뒤 다시 유치원에 간 어린 김리혜 선생은 그곳에도 발레교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어머니를 조르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흔쾌히 허락했어요. 너무 기뻤지요. 유치원에 가려면 족히 30분은 걸어 다녀야 했지만 열심히 다녔어요. 5살이었던 저의 꿈은 훌륭한 발레리나였거든요. 본능적인 욕구에 가까웠어요.”

김리혜 선생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계속 발레를 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자식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부모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문화적인 환경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집도 문화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본 제일의 문화도시 ‘우사시노시’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께서는 문학전집을 준비해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어요. 나이에 맞게 책들을 골라 읽도록 했죠. 가지런히 갠 이불더미에 기대어 책을 봤던 추억이 아직까지도 떠오릅니다.”

중학생이 된 김리혜 선생은 배구부에 들어갔다. 그 당시 일본 여자배구는 붐이었다. 동경올림픽에서 우승한 일본 배구팀은 ‘동양의 마녀’로 불리며 일본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한편 김 선생의 오빠는 야구소년이었다. 제2의 ‘카네다’가 되겠다고 열심히 운동했다. 이처럼 김리혜 선생 가족은 일본인처럼 살았고, 그 문화에 자연스럽게 젖어들었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께서는 형제들을 불러놓고 매우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너희는 한국 사람이다. 한국은 문화적으로도 훌륭한 나라이며, 일본 황실도 삼국시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의 피를 받았다”면서 “우리끼리만 하는 비밀이야기”라고 강조했다. 그 당시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큰일이 나는 세상이었다.

“아버지는 저희에게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계속 주입시켰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차별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밝히기 힘든 시기였지요. 김치 먹는 것조차 숨길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른들은 항상 ‘일본인들한테 지지 말아야 한다’, ‘이겨야 한다’,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일본에 대한 반항심이 무척 강했습니다.

김리혜 선생은 중학교 사회시간에 책을 낭독할 때 ‘우리나라’라고 적혀있는 부분은 읽기 싫었다. 그녀는 ‘우리나라 사람은’을 ‘일본 사람은’으로 읽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업시간에 ‘한국’, ‘조선’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몹시 긴장했다.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갈 바랐다.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는 것은 어린 그녀에게 너무도 큰 두려움이었던 까닭이다.

“운동회나 행사 때가 되면 오른쪽으로 몸을 틀고 일장기를 보면서 국가를 불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본 국가를 절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죠. 오히려 알지도 못하는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자랑하지 못하는 조국 때문에 헤매고 방황했습니다. 마음속의 비밀을 가진 사람처럼 제 얼굴에는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요”

김리혜 선생은 나라의 책임도 있다고 일갈했다. 한일조약 때 한국은 그냥 일본에 귀화하라고 종용했고, 교육에 대한 배려도 없었다는 것. 그녀는 “대한민국은 아무것도 안 했지만 총련은 달랐다”면서 “총련은 동포들을 한 민족으로 여기고 학교뿐만 아니라 교과서, 학용품까지도 지원했으며,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키워줬다”고 말했다.

1973년, 김리혜 선생은 대학생 신분으로 처음 조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한국 여행은 내 인생의 ‘작은혁명’과도 같은 일”이라면서 적잖게 흥분한 말투로 말했다. 그 당시 한국에는 문교부에서 주최하는 재외동포 교육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녀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 왔다.

“어두운 밤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한 배가 다음날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좋아서 파란 하늘에 구름 하나만 떠 있었죠. 갑판 위에서 부산을 봤는데, 멀리 가옥들과 항구, 용두산 공원 등이 보이더군요. ‘여기가 한국이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쉬 가라앉지 않더라고요.”

김리혜 선생은 2주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한국의 역사, 언어 등을 배웠고 여행했다.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또 바람이며, 나무며, 도시 곳곳을 똑똑하게 봤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녀는 관념적으로만 생각했던 조국의 실체를 확인하고 동경하기 시작했다.

“실제 나라가 있고, 조국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도 저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몇 백 권의 책보다도 2주 동안의 경험이, 무거운 그림자처럼 덮여 있던 조국에 대한 시각을 180도 바꿔 생각하게 만들었죠. 동경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김리혜 선생은 일본에 돌아와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일본침략전쟁 반대, 미국 반대를 외쳤으며, 마르크스 레닌주의 등의 책도 읽는 등 이론적인 공부도 병행했다. 그녀는 또 이제까지 숨겨왔던 재일조선인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던졌다. 주위 사람들에게 김리혜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말했다.

일본 대학에는 재일교포 학생들의 모임이 있다. 처음 신입생이 들어오면 선배들은 명단을 확인하고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모임에 참여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 ‘김리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단단하게 호통을 치며 거부했다. 그녀는 이러한 연유로 학교에서 ‘유명 인사’로 통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국에 다녀온 뒤 제 발로 찾아갔다. 실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또 조국의 역사와 언어를 공부하면서 본국의 민주화운동에 연대해 한국 대사관, 민단 등을 찾아가 데모했다. 처음으로 같은 세대의 교포들을 만나 마음을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국춤을 만나 또다시 큰 충격에 빠진다.

“집 근처에 대학교가 있었어요. 하루는 아시아 민속축제를 한다고 해서 관람을 갔지요. 동경 고등학교 학생들이 준비한 공연이었는데, 한국춤을 추더라고요. 이 공연을 보면서 오랫동안 제 몸속에서 잠자고 있던 피가 들끓고 긴장에서 깨어난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장구소리, 장단, 몸놀림 등을 보면서 이것이 조국이구나 느꼈지요.”

김리혜 선생은 곧장 가야금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거기에서 그녀는 한국 전통문화와 춤을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학교 공부는 제쳐두고 춤에 몰두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녀는 “졸업은 했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기본은 했다는 얘기겠다. 그녀가 한국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배운 발레가 밑바탕이 됐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한국춤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강렬한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힘든 결정임은 분명하다.

“한국 학생들은 똑똑하고 우수한 성적을 내도 좋은 직장에 가지 못했어요. 졸업 후 아버지의 사업을 잇는 경우가 많았죠. 운동하던 선배들도 대학을 졸업한 뒤 다시 일본이름을 사용했어요. 함께 데모하고, 청년운동하고, 조국학생과 연대해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변한 거죠. 그래서 묻고 싶었어요. 그때 함께 나눴던 이야기는 무엇이며, 함께 운동했던 것은 무엇이냐고.”

김리혜 선생은 대학시절 한국어를 잘 못했다. ‘고마즈가와여학생 살인사건’으로 사형을 당했던 이진우 학생의 옥중수기를 읽지 않았다면 아직도 한국어가 서툴렀을지 모른다.

“재일교포였던 이진우 학생은 아이큐가 높고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지만, 집이 너무 가난했어요. 일용직인 아버지와 눈먼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돈을 벌어야 했지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학생 2명을 죽인 혐의로 감옥에 갇힌 그는 사형집행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말은 민족의 혼’이라며 우리말을 공부했어요. 말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죠. 저도 그때부터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일교포 가정이 대부분 원만하지 못했듯이 김리혜 선생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부부싸움도 많았다. 때문에 그녀는 빨리 독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리혜 선생은 처음 프리랜서로 잡지사 기자생활을 했다. 그때가 20대 중반의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경제적인 독립은 쉬웠지만 정신적인 독립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또 “대학 졸업할 당시 한국 국립무용단에 들어가려고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 계속돼 한국에 갈 수 없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그녀의 한국춤은 계속됐다. 그러나 춤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를 조절하기 힘들었다. 본격적으로 정통춤을 하고 싶었다. 이대로 가면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1981년 한국에 왔다.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춤꾼 이매방 선생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장단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사물놀이’ 김덕수 선생에게 장고를 배웠다. 그 당시에는 ‘사물놀이’라는 이름도 없을 때였다. ‘사물놀이’는 그룹 이름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덕수 선생은 ‘사물놀이’를 장르화했다.

김리혜 선생은 김덕수 선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국악, 정통 음악을 하는 사람, 어렸을 때 남사당패에 들어가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김덕수 선생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이듬해 김리혜 선생은 그와 결혼했다. 그녀는 “이 사람과 결혼하면 심심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웃어버렸다. 인터뷰는 그녀의 아들 이야기로 넘어갔다.

김리혜 선생의 아들 김용훈은 힙합가수이다. 예명은 ‘수퍼사이즈’로 불린다. 그는 최연소 힙합팀 ‘와일드 스타일’을 시작으로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그 자질을 인정받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를 단단하게 물려받은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는 재일교포로 애매하게 살았지만, 아들에게만큼은 확실하게 피를 돌려주고 싶었다”면서 음악적인 기질보다 ‘한국인’이라는 단어에 더욱 매달렸다.

“사교성이 좋은 아이예요. 어느 곳에서든지 그 사람만 있으면 화목해지는 그런 존재 있잖아요. 리듬감도 굉장히 좋아요. 어렸을 때 잠에 푹 빠진 순간에도 공연이 끝나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박수를 칠 정도였죠.”

남편 김덕수 선생의 사물놀이는 일본에서 먼저 호평을 받았다. 김리혜 선생의 숨은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에 익숙한 그녀는 공연기획뿐만 아니라 프로그램과 악기 소개, 대본 등 모든 것을 일본어로 작성해 소개하면서 ‘사물놀이’를 알렸다.

“한국 사람들은 주위에 소중한 보물이 있는지 몰라요. 외국에서 인정을 받으면 그제야 우리 것이라고 말하죠. 또 브랜드를 너무 좋아합니다. 남편이 누구라고 하면 대우를 하고, 덩달아서 여자도 대우를 받으려고 합니다.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남편의 성취는 자신의 성취와 다른 것입니다. 용훈이도 김덕수 선생의 아들이라는 소개를 무척 싫어합니다.”

“한국춤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춤사위가 자유롭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게 나타납니다. 저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제 안에 있는 일본도 분명 춤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독창적인 한국춤으로 승화시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