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의 얼굴은 환했다. 그와의 만남은 정열적인 ‘라이브’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대로변 커피숍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는 경쾌한 드럼 소리였고, 아스팔트를 태우는 뜨거운 열기는 강렬한 기타 소리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들의 경적소리는 흥겨운 코러스였으며 비둘기들의 날갯짓에 부르르 떠는 바람소리마저도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처럼 감동적이었다.
70년대 안기부의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된 노래 ‘물 좀 주소’의 주인공 한대수 씨를 만났다. 할아버지라고 해도 될 성싶은 나이에 첫 아이를 얻은 그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딸아이를 재우고 나오기 힘들었어”라고 푸념부터 늘어놓는다. 뭔가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잔뜩 묻어있는 새내기 아빠의 표정이다.
딸의 이름은 ‘양호’다. 평소에도 “양호합니다”라는 말을 즐겨 쓰는 그는 “양호한 시절에 양호하게 태어나 양호라는 이름을 지었다”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는 가수 생활 40여 년을 정리하는 첫 베스트 앨범을 발표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딸에게 기막힌 선물을 한 셈이다. 앨범 표지를 열자마자 딸아이를 위한 신곡 ‘양호야! 양호야!’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가사도 마음에 와닿는다. 특히 ‘양호야, 양호야 어서 빨리 나와라... 네가 세상을 보면 시끄럽다 할 거야. 네가 세상을 보면 어지럽다 할 거야’라는 대목에서는 가파른 시대를 살아오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음으로 변용했던 그의 성품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못하겠어.”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빠가 된 가수 한대수.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는 듯 목을 길게 뽑아 웃는다. 사는 것, 죽는 것, 제기랄. 다른 고통은 창조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아이를 갖고 싶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 하지만 큰 기적이, 상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덜컥 양호가 태어났다.
한 씨는 딸 ‘양호’를 갖기 위해 22년 연하의 러시아인 아내 옥사나와 ‘거사’를 벌였다. ‘거사’라는 표현을 쓴 이유를 독자분들께만 조심스럽게 밝히자면 나이가 들어 섹스 횟수도 줄고 기운도 부족했던 그가 5년 동안 여러 가지 체위를 시도하는 고생 끝에 아이를 낳았다는 얘기다.
“그래도 ‘총알’이 남아 있어 다행이야. 사랑하는 마이 와이프가 20대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30대가 되니까 아이를 원하더라고. 20대 때는 자기 수입도 있고, 예쁘니까 남자들이 줄을 섰는데 30대가 되니까 반대가 된 거야. 그래서 오케이 해버렸지. 그런데 말이야. 아이를 낳으니까 없던 물욕이 생겨. 아빠로서 책임감도 느끼고. 건강하고 오래 살고 싶고.”
쉽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지만 밝고 담백한 어투로 털어놓는 그에게서 삶에 대한 가득한 애정을 발견한다. 육십 대에도 락커의 길을 걷고 있는 에너지의 비밀은 천성적인 ‘솔직함’에서 기인한 것이 분명하다. 아내의 간절한 요구가 없었다면 ‘양호’는 그의 가슴속에서만 자랐을 듯싶다.
가수 한대수에게는 여러 가지 별칭이 있다. 최근 늦깎이 아빠된 것도 ‘덤’으로 추가해야겠지만 그에게는 ‘한국 최초의 싱어 송 라이터’, ‘한국 히피 문화의 선구자’라는 수식어구가 따라다닌다. 특히 ‘명반’이라고 불리는 앨범 ‘멀고 먼 길(1974년작)’의 주인공이 대표적이다. 이 앨범은 사회성 짙은 노랫말과 함께 허스키하고 강렬한 보이스로 극찬을 받으면서 명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별칭을 얻게 된 속사정을 들어보면 마음이 울컥하다.
한 씨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가 태어날 무렵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가 미국으로 유학 갔다 실종된 까닭이다. 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알게 됐고 고독을 채우기 위해 음악을 들었다. “음악은 마음을 달래주는 위로의 대상이었어”라는 그의 말처럼 음악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사정은 아내 옥사나도 비슷하다. 그녀도 아버지 없이 컸다.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 부부에게 ‘양호’는 ‘기쁨’ 이상이라는 존재감이 뼛속 깊이 느껴진다.
“비틀스 노래를 듣고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어. 그 당시에 노래, 작곡, 연주를 모두 하는 음악가는 없었거든. 또 가사에는 마음의 고통, 고독,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지. 매우 색달랐지. 그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어.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대학 캠퍼스에서 노래 부르는 게 좋았거든. 걸프렌드도 사귀고. 그 당시에 대학생들이 좋아했던 음악다방이 있었는데 무교동에 있는 ‘세시봉’이야. 여기서 내가 작곡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 이후에 미국 갔다 오니까 음반사에서 판 내자고 그러더라고. 김민기 씨, 양희은 씨가 내 노래 ‘바람과 나’, ‘행복의 나라로’를 불렀거든.”
부모의 피는 물려받는다고 했다. ‘양호’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될지 모를 일이다.
“목적 없이 걸어온 길, 돌이켜 보니까 음악이었어. 아버지의 실종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음악을 하고 있지 않았겠지”라고 말하면서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문득 떠오른다.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아 한국 대중음악과 ‘양호’ 옆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그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고독과 절망이 만든 한대수 음악의 길을 걷지 않도록.
“공부 많이 했네.”
“아니에요. 음악을 좋아해서 그래요.”
2006년 민중가요의 대중화를 위해 현대적인 감각으로 리메이크한 앨범 ‘아가미’ 얘기를 꺼내자 한 말이다. 그는 이 앨범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혼을 담아 불렀어. 그 느낌이 너와 내가 통한거야. 가수 생활하는 동안 남의 노래 부른 게 4곡뿐이야. 김민기, 존 레논, 영 블러드 그리고 님을 위한 행진곡이지. 아내가 이 노래를 듣자마자 러시아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고.”
이 앨범에 수록된 그의 노래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가슴을 후벼 파는 떨림으로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대중문화는 패스트푸드처럼 쉽고 간단하며 유사한 맛이 난다. 예술성이나 창의성보다는 돈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가치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는 까닭이다. 대중음악도 마찬가지다. 세계화와 자본의 과도한 개입으로 말미암은 획일화 현상이 지나치게 팽배한 상태다. 진정 묘안은 없는 것일까.
“서양에서 대중음악은 락(Rock)음악을 뜻해.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자본주의가 단단해지고 자본이 문화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획일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어. 패션(유행)은 30년마다 바뀌기 때문에 언젠가는 지금처럼 달콤한 사운드를 지겨워하고 아름답지 않은 음악을 원하는 시대가 올 거야. 한국만 그런 게 아냐. 전 세계적인 음악의 흐름이 그래. 1975년을 기점으로 전성기는 끝났어. 비틀즈, 레드 재플린, 밥 딜런, CCR 등 걸쭉한 음악가들 이후 창의성이 사라진 지 오래야. 20년 전 LA 동쪽 할렘가의 젊은이들이 시작한 ‘랩’이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어. 스타일만 받아 상류층 음악이 된 거야. 창의적이지 않아. 예전에는 기획사라는 게 없었어. 도넛처럼 판에 찍어 내는 음악이 아니었지. 그런데 자본주의자들이 개입해서 산업화되기 시작했어. 그때부터 음반산업이라는 말이 등장한 거야. 음악 중심이 아니라 돈 중심으로 바뀐 거지. 80년대 ‘뉴 키즈 온 더 블록’ 같은 그룹이 기획사를 통해 브랜드화된 그룹이야. 그래서 우리나라도 비와 이효리가 있는 것이고. 자본주의가 정당화, 체계화됐어. 괴물 같은 신용카드가 등장하면서 더욱 심화됐다고 봐. 아마 주민번호도 필요 없을 걸. 신용카드 번호면 되거든.”
그렇지만 그는 “희망은 버리고 싶지 않다”면서 “언젠가는 고인 물은 흐를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계에서는 ‘고인 물’이라는 말이 있어. 그 소리가 그 소리,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뜻이야. 클래식 음악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30~40년 전 유행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이 지금 한국 무대에 오르고 있고. 90년대 초 빌 게이츠의 인터넷 혁명이 사람들을 편하게 만들었지만 많은 것을 빼앗아갔어. 인간의 창의력 말이야. 인터넷은 과정 없이 답을 줘. 예전에는 한대수가 누구인지 궁금하면 중앙도서관에 가서 음악 서적을 뒤져봐야 했지만 지금은 검색하면 다 나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포르노나 끔찍한 것들이 발달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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