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우연한 기회에 불화를 그려본 적이 있다. 불교 경전에 묘사된 ‘지옥도’였다. 불화는 작업 자체가 매우 정밀한 데다 비현실적인 형상들이 많아 아이디어를 짜내는 데 무척 힘들었다. 또 석회 가루를 잔뜩 묻히고 불을 내뿜는 무서운 신들을 하나하나 캔버스에 그려 넣다 보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서늘해지는 것이 느껴져 불화는 아무나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회화를 하는 김연진 작가의 말에서 그 당시의 느낌을 오랜만에 다시 음미해본다.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렵다. 부처님 법을 듣기 어렵다. 이 글귀는 법구경 ‘불타품’ 중에서 부처님이 네 번째로 하신 말씀이다. 부처님의 그림을 그리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항상 듣기를 원하고 항상 귀 기울이자는 내 마음이 담긴 글귀다.”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깨끗한 화색에 마음이 매료된다. 마음속을 채운 온갖 부정적인 카르마가 정화되는 기분이다. 불화는 고통을 덜어주고 깨달음을 선사하는 힘을 지녔다.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반대로 바라보는 불화, 삶의 희망이 되고 평화가 되어 더 놀라운 지혜의 숲으로 인도한다.
지상을 초월한 영적인 존재와의 만남. 탐욕과 욕망의 불꽃을 다스리고 중생을 구제했던 아름다운 정령들이 화폭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산사에서 보는 싯다르타보다 더욱 강렬했다. 도시라는 공간이 주는 창백함 때문이다. 불화는 누가 아프고, 어디가 어려운지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도시 생활의 비정함을 한없이 달래준다.
불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앞 시대의 화법을 익히고 기량을 연마하기 위해 옛 작품들을 그대로 그려내는 작업을 한다. 이것을 ‘임(臨)’이라고 한다. 이러한 수련이 바탕이 되면 원작을 응용해 자신의 화법대로 그리는 ‘방(倣)’이 있고,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점으로 작업하는 ‘창(創)’이 있다.
김연진 작가의 전시에도 임, 방, 창 과정의 작업들이 모두 소개돼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불화들 중 뛰어난 예술성과 격조 높은 웅장함,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통도사 ‘삼신불회도’가 제일 먼저 시선을 끈다. 이 작품은 김 작가가 조선시대의 화승 임한의 불화를 ‘임모’했다.
화승 임한은 조선 숙종 말 전통적인 도상과 함께 새로운 색채와 독특한 구상으로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화승이다. 1718년 기림사 삼신불회도로 처음 법명을 올렸으며, 마지막 작품으로 1759년 통도사 삼신불회도를 그렸다.
“통도사 삼신불회도를 그리면서 화승 임한의 불심과 공력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채색이 화려한데, 전통불화에서 채색은 다섯 가지 원색을 위주로 사용한다. 주(朱:붉을주), 녹청(綠靑), 군청(群靑), 황토(黃土), 금니(金泥)다.”
김 작가의 작품에는 고려불화의 기법을 이용한 아미타삼존도,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 약사여래도가 있다. 고려불화는 고도로 숙련된 기법과 자연스러운 색채로 보는 이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한다.
“고려불화는 색감의 미묘한 변화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색채의 단순성을 완화시키기 위해 얇은 묘선을 중복으로 긋고 그 위에 다시 문양을 그려 넣는다. 고려불화의 아름다움은 조화의 미(美)이며 그것은 곧 고려인들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처음 김 작가가 불교미술을 하게 된 것은 고려불화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전통회화 기법을 대해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다가 불교미술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현존하는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불화였다. 그 안에 내가 배우고 싶던, 산수, 채색기법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었다. 전통회화를 배우기 위해서 불화를 관심을 갖게 됐는데, 알면 알수록 불화의 색감, 필치, 매력에 빠졌다.”
불화는 종교적인 회화 이전에 오랜 시간 한민족의 삶을 지탱해왔던 정신문화의 소산이다. 지식과 지혜의 불꽃을 지펴 우리 조상들을 구족했던 전통문화 중의 하나다. 따라서 불화는 작가의 예술세계를 그대로 느끼고, 그림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다. 자신이 믿는 종교와 다르다고 해서 무작정 폄훼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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