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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 그래피티 아티스트 - 어떠한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돼 있다

이동권 2022. 9. 27. 17:34

범민 그래피티 아티스트


한국을 대표하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범민. 그의 롤모델은 사회주의자이자 반자본주의자, 예술로 거리 혁명을 실천한 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다. 뱅크시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창조적인 풍자로 그려내고,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이디어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범민은 한국의 뱅크시를 꿈꾼다. 기교나 장식 위주의 그래피티보다는 주제와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진정한 거리의 예술가가 되길 원한다. 보수적인 한국 미술계에 그래피티 아트를 하나의 완벽한 예술장르로 인정받게 만드는 꿈도 꾼다.

아직 한국에서는 그래피티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 예술이라고 평가하기보다는 낙서라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있다. 그 틀을 아티스트 범민이 차근차근 깨부수고 있다. 그래서 범민은 거리의 예술이 갤러리로 들어가는 것도, 형식적인 면에서 대중화를 시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피티의 발전을 위해 어떠한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돼 있다.

“그래피티에 반전, 평화를 담아낸다면, 이것이 ‘민중의 소리’입니다. 베를린 장벽에 평화의 꽃을 그리고, 모나리자가 박격포를 쏘는 이미지로 반전을 외치고, 아프리카 아이들이 두 손에 맥도널드 햄버거를 들고 양팔을 벌리며 반자본을 상징하게 만드는 그래피티가 바로 민중의 예술입니다.”

범민은 도자기 공예를 전공했다. 도자기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성적에 맞춰 대학을 선택하다 보니 도자기 공예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범민이 도자기 공예를 무작정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를 그리고 싶은 욕망이 컸던 탓이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변했다. 도자기 공예를 그래피티에 활용하면 어느 누구도 시도할 수 없는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20살 때 도자기 공예가 진부하게 느껴졌습니다. 뭔가를 그리고 싶은 욕망이 컸지요.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도자기 공예가 싫지 않습니다. 도자기와 그래피티의 만남을 시도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피티는 휘발성이고, 일회적이고, 가벼운 느낌이 있습니다. 이러한 느낌을 도자기가 보충해 줄 것입니다.”

도자기 공예는 예술성과 함께 기술력도 중요하다. 숙련된 예술가만이 훌륭하게 도자기를 빚고 구워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도자기 예술가와 힘을 합쳐 작업하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도자기 모형을 변형시킨 작품도 구상 중이다. 단순히 도자기에 프린팅하는 것을 넘어서는 작업이다. 아직까지 작품이 세상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피티를 담아낸 도자기는 생각만으로도 세계시장에 파란을 일으킬 것 같다.

나아가 범민은 그래피티를 발전시켜 입체, 설치미술 쪽으로 자신의 작업 방향을 발전시키고 싶다. 그것은 비주류 예술로 소외받아온 그래피티를 주류 미술로 바꾸는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저게 무슨 그래피티야 할 정도로 색다른 저만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그래피티라는 장르를 확장시키고 싶습니다. 그래피티를 잘 알리고, 시장을 확대하고,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고 싶습니다.”

범민이 그래피티를 하게 된 이유는 힙합 때문이다. 범민은 어렸을 때부터 힙합을 좋아했다. 힙합의 4대 요소는 비보이, 디제이, MC, 그래피티. 따라서 미술을 공부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그래피티도 좋아하게 됐다.

“처음 그래피티를 하는 저를 보면서 친구들은 재밌어했습니다. 부모님들도 처음에는 취미로 하는 줄 생각했지요. 하지만 20대 중반이 되자 친구들은 아직도 그래피티를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부모님들도 취직하길 바랐습니다.”

그는 그래피티를 멈출 수 없었다. 때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앞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종종 ‘나이’라는 벽에 부딪치기도 했다. 한국에서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나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이가 어리다 보니 그저 재미 삼아 그래피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범민은 10년 넘게 그래피티에 열정 쏟은 끝에 작가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서도 점점 벗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용돈벌이 수준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고 있다.

그래피티는 락카로 그림을 그린다. 웬만한 테크닉이 아니면 락카로 섬세한 그림을 그리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피티를 하는 데는 락카를 다루는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거리, 속도, 압력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온에도 신경을 씁니다. 락카는 여름에는 압력이 올라가고, 겨울에는 내려갑니다. 이런 점을 잘 조절해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습니다.”

락카 자체도 문제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락카는 한계가 있다. 컬러가 다양하지 않아 그림을 그리는 데 유용하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수입 락카를 사용한다. 범민은 ‘동서 스프레이’에서 다양한 컬러의 락카를 주문해서 사용한다.

그래피티는 작업 자체도 힘들다. 락카를 칠하면서 생기는 뿌연 가스 때문에 꼭 방독면을 써야 한다. 방독면을 쓰지 않으면 폐로 가스가 계속 스며들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날씨도 그래피티 작업을 어렵게 하는 요소다.

“실외작업이 많기 때문에 여름에는 더워서, 겨울에는 추워서 힘듭니다. 높은 곳에는 사다리를 타야 합니다. 그래피티는 예술과 노가다의 경계에 있는 작업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래피티를 하는 여자 작가들이 없습니다.

범민은 뉴욕에 다녀왔다. 건물 벽면 전체가 그래피티로 돼 있는 곳에 자신의 그래피티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다. 이곳에는 세계 유명의 그래피티 작가들이 찾아와 작품을 남기고 있으며, 이러한 족적들이 쌓여 이 건물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그래피티 명소가 됐다.

“이 건물은 관광명소가 됐습니다. 취재하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상업화가 돼버렸습니다. 제가 이 건물을 영상으로 찍으려고 했는데 집주인이라는 사람이 막아섰습니다. 상업적인 촬영이 아니라고 했지만 돈을 내고 찍으라고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서 줬더니 흔쾌히 승낙해 줬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내야 촬영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사진이나 영상을 찍을 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얼굴은 찍으면 안 됩니다. 실재 모두 갱들이거든요.”

이 건물에는 동양인이 그림을 그린 적이 거의 없었다. 언어가 잘 통하고 갱 문화를 이해하면 상황은 달라질지 모르지만 이곳을 잘 아는 지인이 없으면 언감생심이다.

“우연히 미국 친구를 알게 됐고, 우리 집에 와서 한 달 동안 지내게 됐습니다. 이 친구들이 뉴욕으로 가서 그림을 그리게 해줬습니다. 미국은 더치페이 문화가 일상화돼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친구들에게 여기는 한국이니까 제가 내겠다면서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미국 친구들이 저에게 ‘뭘 바라는 게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어서 그랬나 봅니다. 반대로 제가 미국에 갔을 때는 그 친구들이 숙박과 식사, 미국의 밤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한 달 정도 뉴욕을 경험했습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피티의 주류화를 꿈꾸는 범민에게 ‘인제 갤러리로 들어가시나요.’라고 묻는다. ‘유명해지니까 거리 문화를 버리느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고향을 버릴 수 있을까. 더구나 범민은 그래피티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고, 자신의 머리는 낮춰서 대중과 소통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스케일의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최대한 큰 건물의 주인을 설득해서 그 벽면에 이미지 큰 것 하나를 남기고 싶습니다. 만약 주먹을 그린다면 건물 벽면 전체에 주먹 하나가 큼지막하게 있는 그래피티.”

 

범민 그래피티 아티스트의 인스타그램에 가면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