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박중하 사진가 - 평생 일탈을 꿈꾸고 실행한 ‘근간인勤幹人’

이동권 2022. 9. 26. 22:51

박중하 사진가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을까. 아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행복을 누릴 권리’는 동등하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남들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욕심을 부리고, 자기 것 챙기기 바쁘다. 사사로이 탐을 내 결국 탈이 나거나 외롭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을 버리거나 행복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않아 더 많은 행복을 얻기도 한다. 박중하 작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박중하 작가는 평생 ‘일탈’을 꿈꾸고 실행했다. 일탈만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락한 삶을 꿈꾸고, 안정적인 삶에서 물러서길 주저했지만 그는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생각했다. 물질이나 명예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해진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조지약차早知若此’라는 게 없었다. 딱 이거다 싶으면 달려들었고, 행여 일이 틀어져도 후회하지 않았다.

“제 삶은 일탈의 연속이었습니다. 일탈이 삶의 ‘활력소’였죠. 인생의 진로를 바꿔왔던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힘든 만큼 돌아오는 것이 보였거든요.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죠.”

박중하 작가는 ‘쥬커맨(Juker Man)’으로 불린다. 외국에서 공부를 했거나 영어학원에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한국 이름은 발음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부르기 쉽게 영어 닉네임을 사용하는 한국인이 많았다. 쥬커맨도 박 작가가 외국에서 공부하며 붙인 이름. 하지만 ‘쥬커’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직업을 ‘디스크자키’라고 생각하던지, 약물중독자 ‘Junkie’로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박 작가는 사진을 찍는다. 영문학을 공부하고 취재기자로 일하다 돌연 사진작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사진이 그에게 준 ‘영감’이 분명 있을 듯싶다. 안정적인 직장과 보수를 뒤로 하고 험난한 작가의 길을 선택하게 만든 ‘배경’이 궁금해진다. 그러나 그 이유는 너무도 단순했다. 사진이 좋아서다. 또 그가 사진을 찍게 된 데는 ‘필연’적인 부분도 있었다.

“사진을 찍은 지 오래됐습니다. ‘큰형’이 유명한 사진작가였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아이들이 블록놀이를 할 때 저는 카메라를 분해하면서 놀았습니다.”

그는 영문학을 공부한 것이 사진작가를 하는데 매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교류하는 사람들 중에 외국인이 많아서다. 또 그가 국내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작가가 된 게 아니라 외국에서 사진을 찍다 들어온 ‘이단아’인 까닭도 있다. 한국 사진계는 학연, 지연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아 외국에서 들어온 작가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사진작가가 되기 전 에디터로 일했다. 하지만 에디터로 일하면서도 취재원들의 사진을 사진기자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모두 찍었다. 그래서 그는 사진 기자들이 기피하는 대상 ‘1호’였다.

“제가 취재하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사진부에는 필름만 던져주곤 해서 사진기자들 눈에 났습니다.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취재기자로 일하면서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는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사진을 꼭 전공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진에 대한 ‘열정’과 ‘성실’이다. 그래서 그는 기자생활을 접고 사진작가로 인생의 항로를 틀면서 스스로 약속했다. 하루에 3시간씩은 꼭 사진을 찍자는 것이다. 이후 그는 그 약속을 어겨본 적이 없다. 유행가의 노랫말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었다. 그가 이런 생활을 한지도 6여 년이 돼간다.

“직장에서 일할 때는 시간에 맞춰 일하니까 흐트러지지 않는데, 혼자 일하면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전업 작가로 나서면서 자신을 통제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칫 방탕과 무규칙으로 무너지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것이 마치 예술가의 ‘기질’이자 ‘특권’인 것처럼 인정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예술은 혹독한 노동을 수반하기 때문에 인내심과 끈기, 성실함이 없으면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성공하기 힘들다.

그의 남다른 성실함은 그의 작품을 알게 모르게 많이 팔리도록 도왔다.

“작가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치’, ‘이 작품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콜렉터에게 약속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콜렉터들은 작품을 삽니다. 저는 페이스 북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국내외 페이스 북 친구가 1,600명이 있는데, 매일 그 친구들에게 새로운 작품을 보여주고 사람들과 교류했습니다. 오프에서도 만나 신뢰감을 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작품이 많이 팔렸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긴 돈으로 다른 작업을 위한 여건을 마련합니다.”

기자 → 데스크 → 인터넷방송 → 사진작가가 되다

박중하 작가는 조용한 몽상가였다. 생각도 어투도 모두 잔잔했고, 수줍음도 조금은 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굳건해 보였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실實’을 따졌고, 남에게 의지하는 법도 없었으며, 당차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왔다. 그가 사진작가가 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점은 금방 느껴진다.

박 작가는 월간 <마리안느>, <세계 여성>에서 취재기자를 했다. 그런데 돌연 취재기자를 그만두고 IT매체의 데스크로 자리를 옮겼다. 여성지에 기사를 쓰면서 사람들에게 많이 치인 까닭이다. 자신의 기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무리 기사를 잘 써줘도 아쉬워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궁극적으로 봤을 때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슬럼프였죠. 저는 기자생활을 접고 데스크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IT 쪽도 여성지와 마찬가지였습니다. IT도 결국 사람이 끌고 가더라고요.”

그는 사진작가를 시작하면서 즐거움을 찾았고,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사람을 얻는 비결은 사생활을 완전하게 오픈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제가 이상하다 싶다가도 마음을 문을 열었습니다. 제가 먼저 발가벗어야지 남도 따라 벗거든요. 취재기자를 할 때, 30대 때는 과격하게 맞서버렸는데.(웃음)”

1997년, 그는 사진작가가 되기 전 인터넷방송국 ‘M2 station’을 개국했다. 자체 방송을 제작하고 스트리밍 서비스도 하는 방송국이었다. 지금이야 보편화된 게 인터넷방송국이지만 그때만 해도 ‘최첨단’이었다.

“말도 안 되는 컴퓨터 사양으로 모든 작업을 했습니다. 30분 비디오물을 인코딩하는 20여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괜찮았습니다. 돈을 벌자는 것이 아니었어요. 하고 싶은 일이었거든요. 그래도 자부하는 건 업계에서 제일 먼저 했던 인터넷방송국을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가수들도 저희 방송국에 와서 데뷔를 하곤 했습니다. 가수 유리상자도요.”

박중하 작가가 작업의 주요 주제로 삼은 것은 ‘사람’이다. 이는 단순히 ‘사람’이라는 피사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감동’에서다. 그가 포트레이트 Portrait 작업을 가장 좋아하는 것도, 사진에 기술보다는 내러티브를 많이 담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박 작가는 작품의 소재를 길에서 얻는다. 하루에 7~8km를 꾸준하게 걸으면서 인물을 관찰하고, 아주 흔한 장소에서 이야기를 뽑아낸다. 인물사진은 아니지만 그가 최근 발표한 작품 ‘Red for Life’는 그의 예술세계를 그대로 투영한다.

그는 5년 동안 소화전 작업에 매달렸다. 길을 걸어가면서 발견한 ‘소화전’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소형 오리지널로 프린트해 판매했다. 5천 원 이상 기부하면 그는 작가의 서명과 함께 이 사진을 증정했다. 순직 소방관 가족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같은 소화전이지만 환경에 따라 그 모양이나 색이 달라집니다. 생산될 때는 똑같지만 고급아파트 단지에 있느냐, 구로동 공사판에 있느냐, 노량진 수산시장에 있느냐에 따라 바뀌기 시작합니다. 노량진 수산시장의 소화전 같은 경우는 비린내가 나고, 소금에 절어 녹슬어 있습니다. 사람의 인생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화전이 생명체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은 순직 소방관을 위해 기부한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환기가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디지털보다 아날로그 사진을 더욱 선호한다. 필름 사진은 여전히 디지털 사진과는 많이 다른 사진을 남겨준다는 이유다. 하지만 작업이 쉽지만은 않다. 20년 전과 비교해 재료비가 10배 이상 올라 경제적 부담이 크다. 현재 필름 한 통 가격은 7~8천원에 달한다.

“아날로그는 바로 보여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필름은 화학적인 작용으로 찍어내기 때문에 무수한 결과물이 나옵니다. 찍기는 어렵지만 후반 작업이 쉽습니다. 반대로 디지털은 찍자마자 답이 나옵니다. 하지만 똑같은 것만 양산해 재미가 없습니다. 인물 사진 같은 경우는 디지털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바로 찍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지털이 의외로 작업시간이 짧을 것 같지만 후반 작업이 깁니다. 사람들은 ‘디테일’을 예로 들며 디지털이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은 디테일은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3~40년 전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을 보면 현재의 디지털사진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중하 작가의 삶은 흔들리며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보듬어준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지, 아니 무엇이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오직 스펙을 쌓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청춘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가 살아왔던 삶, 새로운 것은 없을지라도 조금은 긍정적인 시선으로 삶을 설계하는 태도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박 작가는 현재 단국대 방송영상정보학부 겸임교수, 국립 한밭대학교 공업디자인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스스로 ‘일탈’이라고 표현했지만, 거침없이 인생 항로를 틀면서 체득했던 자신만의 철학과 태도를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전수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진 교육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찍는 사람의 철학, 이론적인 교육이 부족합니다. 테크닉만 있습니다. 전체적인 그림보다는 디테일에 치중합니다. 메시지는 보지 않습니다.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런 점을 많이 잡아줍니다. 또 사진을 찍고 난 뒤 아니다 싶으면 바로 삭제해버리는 학생들이 있는데 저는 세상에 한 장 밖에 없는 사진이니까 소중하게 처리하라고 가르칩니다.”

처음 학생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의 얘기가 어딘가에서 들었던 교습법과는 무척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와 작업을 해보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사진에서 ‘메시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사진작가는 록앤롤의 역사를 기록한 짐 마셜 Jim Marshall이다. 새를 괴롭히던 ‘조니 캐쉬’도, 자신의 기타에 불을 지르던 ‘지미 핸드릭스’도 모두 짐 마셜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또 그는 비틀즈의 마지막 공연에서 유일하게 백스테이지 Backstage에 들어갈 수 있던 유일한 사진작가였다.

그는 특별한 이유는 없이 짐 마셜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금보다 더 늙어서 그 사람 닮았다는 소릴 들어보고 싶단다. 자식 없이 지난해 3월 눈을 감았던 짐 마셜이 늘 하던 말을 생각해보니, 그가 꿈꾸는 삶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I have no kids,” he said. “My photographs are my childr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