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황동열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 - 산업도 좋지만 철학이 우선

이동권 2022. 9. 26. 00:27

황동열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교수


황동열 중앙대학교 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소수의 특권층, 상층 지식인들의 오만을 오직 원칙과 성실을 기준으로 거리낌 없이 대한다. 그들처럼 존경받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미사여구 따위나 뇌까리는 지식인들과 다른 점이다. 그는 이와 같은 소신 때문에 한때 사람들에게 ‘기피대상 1호’로 여겨진 적이 있었다.

“예술의전당에서 미술부장을 하는 동안 몇 번이나 쫓겨날 뻔했다. ‘박사라는 놈, 교수라는 놈이 있는데, 전시는 성공하지만 왠지 불안하다’, ‘정보 자체가 통제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미술가들하고도 붙었던 적이 있었다. 명색이 미술부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전시장에 미술과 관계없는 만화, 컴퓨터 키보드, 패션 등을 전시해서다. 미술가들 입장에서는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예술적인 의상이 앞으로 나가줘야 디자인도, 산업도 뒤따라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 신념이었다.”

황 교수는 예술의전당이 생긴 이후 관람객을 가장 많이 끌어들인 미술부장으로 유명하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았는지, 관람객들이 사당동에서 예술의전당까지 줄을 설 정도였다. 그가 기획한 전시로는 한국현대사진흐름전, 이집트 유물전, 중국문화대전 등이다. 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은 기획은 없었다. 하지만 이집트 유물전 같은 경우는 국제적인 고소고발사건으로 얼룩졌다. 이집트박물관 관계자들이 자국을 방문한 한국 정부 관료에게 직접 그를 해고시켜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다. 중국문화대전 같은 경우는 그 당시 중국 작품을 들여오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지만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협조를 이끌어냈다. 그가 기획한 전시들은 예술의전당 역사에 전설처럼 남아 있으며, 전무후무한 성과를 남긴 행사로 기록돼 있다.

“지금은 지식경제부지만 예전에는 통상산업부였다. 그때 박재윤 장관이 내정됐는데, 그는 미술의 흐름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박 장관은 직원들을 데리고 음악당에 자주 왔는데, 그때마다 꼭 미술관에 들렸다. 으레 그렇듯이 유명인사가 오면 미술관 책임자가 안내하게 돼 있다. 그래서 둘이 친분을 쌓게 됐다. 이후 박 장관은 디자인이 산업의 핵심이라 여기고 통상산업부에 디자인 산업과를 새로 만들어 수출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때 나는 그 부서에 들어가서 정책을 개발하는 일을 했는데, 당시에 디자인 개발사업을 신청하면 5억씩 지원금을 줬다. 190여 개의 신청서류가 접수됐다. 한국에서 최고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모두 신청했다. 하지만 평가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름에 휘둘리지 않고 과감하게, 객관적으로 서류를 평가했다. 교수들 모두 다 떨어졌다. 자기 이름만 믿고 엉성하게 서류를 작성한 사람들이었다. 이후 장관에게 투서가 들어갔다. 하지만 내 손을 들어줬다. 계속 열심히 해달라고 당부까지 해줬다.”

 

황동열 교수는 정년퇴임을 하고 현재 국제디자인교류재단 이사장,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명예교수를 엮임 중이다.


예술경영의 현장에 살다

황동열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도서관학과로 전공을 선택할 때에도 사서자격증을 취득해 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처음 취직한 곳이 원자력연구소였다.

“도서관뿐만 아니라 모든 연구소에는 도서관이 있다. 자료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근데 거기에는 책이 아니라 마이크로 필름, 비디오 같은 자료들이 있었다. 원자력 관련한 전 세계의 정보가 오프라인으로 들어왔다. 그때 나는 정보를 다루는 곳이 도서관만이 아니며, 책과 다른 자료들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거기에서 근무하다 1982년 전남대, 광주대 도서관학과 교수를 거쳐 다시 서울 예술의전당으로 갔다.”

그가 예술의전당으로 자리를 옮긴 이유는 중심부에 프랑스 퐁피두센터 같은 것이 들어선다는 얘기를 듣고서다. 퐁피두센터는 갖가지 콘텐츠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곳. 여기에는 매체자료실(BPI)을 비롯해 파리국립근대미술관(MNAM), 음향조절센터(IRCAM), 디자인센터(CCI)가 있다. 한마디로 문화와 산업을 이어주고, 새로운 콘텐츠를 창조하는 데 밑바탕이 되는 곳이다.

“도서관학과 출신이 없다고 해서 예술의전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술자료관을 ‘아카이브’라고 하는데, 물건도 아니고 책도 아닌 정보를 모아둔 곳이다. 문화콘텐츠 활성화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카이브인데, (이 얘기는 나중에 하고) 누가 정보를 쥐느냐를 가지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예술의전당이 싸웠고 결국 빼앗겼다. 당시 내가 받은 박사학위는 미술정보에 관한 것이었다. 또 예술의전당 직원 중 교수 출신은 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미술관 책임자가 됐다.”

그가 미술부장을 맡으면서 새롭게 경영문제가 대두됐다. 그전에는 재정에 관계없이 그냥 그대로 운영하면 됐지만 재정자립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경영문제까지 참여하게 됐다. 때문에 그는 항상 예술의 첨예한 현장 한가운데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예술경영에 대한 지식을 하나하나 습득하고 체험할 수 있었고 놀랄 만한 성과를 냈다. 그가 아카이브를 화두로 꺼낸 것도 충분한 현장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향후 이러한 전문지식은 그가 행정가에서 다시 예술경영학과 교수로 변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국에서 최초로 예술아카이브를 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연희조형관을 세운 조각가 김영중이다. 전남 장성 사람인데, 한국에서 열린 조각 관련 전시회의 도록을 모두 모아놓았다. 미술품은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다. 객관성을 띄려면 비평이 필요하다. 박물관의 모든 정보는 구라다.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누가 봤냐. 가보길 했냐. 그랬다는 것뿐이다. 책도 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오래 남으면 굳어지지만 그런 역사를 바꿔주는 것이 아카이브이며, 작가의 창의적 발상과 내면적 세계까지도 알 수 있는 것이 아카이브다. 어느 화가가 보낸 편지가 있다고 예를 들어보자. 그것이야말로 어느 비평가의 말보다 더욱 정확한 정보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임진왜란 때 원균이 이순신보다 충성심이 없고, 싸우지 못했을 것 같나. 아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날그날 하루를 꼼꼼하게 기록했었고, 그것이 역사에 남았다. 이것이 바로 아카이브다. 아카이브는 지식의 보고요, 정보의 통로다.”

문화콘텐츠 강국, 잠재력 있다

삶에서 가장 많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예술이다. 우리의 삶이 보다 깊고 섬세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이유도 예술이며, 모든 인식과 체험 속에서 자칫 놓칠 수 있는 철학적 질문들을 문득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예술이다. 하지만 예술이 산업과 연결되면서 새로운 양상을 낳게 됐다. 구세대의 질서에 연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변화에서 결정되고 강요되는 새로운 질서가 마치 지진처럼 한 나라의 문화정체성까지 깡그리 무너뜨리게 된다. 예술경영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정립해나가고 있는 선구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황 교수의 혜안이 궁금하다.

“세상은 명확한 게 없다. 본질이 비본질이 되고 객관이 주관이 되기도 한다. 요즘 이러한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 사실 문화가 산업이 되고 예술이 경영이 된다는 말 너무 현란하다. 좀 비껴가고 싶다. 세상은 급하게 움직이고, 예술의 영역은 크다. 내가 그런 것들을 잘 읽어서 학생들한테 설명해줘야 하는데 능력과 시간이 안 된다. 문화산업, 예술경영, 문화정책에 대한 한국의 학문은 일천하다. 1980년대 들어와서야 문화정책을 생각했고, 문화콘텐츠라는 말도 2000년대 들어와서 나온 용어다. 이러한 학문이 부딪치고 깨지는 과정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철학이 부재하는 것을 느낀다. 철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학문이든, 현상이든 간에 그 부분이 부족하다. 현상을 이야기하기에는 급히 변화되고 있고, 문화, 산업, 예술, 경영이 모두 크다. 예술경영은 새로운 사회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상과 철학을 연결시키기가 어렵다. 문화가 산업이 되고 예술이 경영으로 가도 되지만 현상과 미래를 이끌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류나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게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급하게 사회가 따라가다 보니까 정보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속성, ‘자만심’을 만들어낸다. 또 예술을 산업으로 치부해버리면 민족정체성 해체, 문화변형의 문제 등이 발생한다. 지금 너무도 생각이 없다. 이제라도 그러한 부분에서 이 용어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해봐야 한다. 철학이 있다면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 있다. 능력이 없으면 외부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소화능력이 있으면 우리 것이 된다. 또 예술이 기술에 종속되면 안 된다. 창의성이 예술의 기본인데, 기술이 먼저 가버리면 예술이 거기에 맞춰야 한다. 독창적인 예술은 기술이 없으면 나오지 않았다. 기술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은 미술을 하는 사람들이 기술을 끄집어오는 것이었다. 기술이 표준을 만들어버리면 예술은 기술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미디어 융합기술 같은 보편화 작업은 필요하다. 이미지를 만드는 디지털 기술만 수천 가지다. 기술이 틀리면 데이터베이스 구성을 할 수 없다.”

문화는 힘의 행로를 따라 움직인다. 거기에는 유혈과 공포, 야만성과 시련이 만들어낸 잡다한 것과 함께 모든 세속적인 지혜까지 포함된다. 과도한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잠식해가고 있는 이때 무엇보다도 예술의 역할과 책무를 강조하는 그의 뜻에 깊이 동감할 수 있었다.

한편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교육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관념적인 주입을 넘어 생활 안에서 실천해나가려는 인식과 추진력도 필요해 보였다. 우리가 예술을 산업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다. 그러나 황 교수는 상황은 매우 희망적이라고 진단했다. 그러한 문화적 바탕과 솜씨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집단적 무의식을 가지고 있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봐도 알 수 있다. 내면에 흡수가 되면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감’을 잡는 데 선수다. 손재주도 매우 뛰어나다. 중국 사람들은 세밀화를 못 그린다. 하지만 우린 다르다.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콘텐츠도 매우 훌륭하다. 동북아에서 언어와 글자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한국, 러시아, 중국, 몽골이다. 이 중에서 몽골은 러시아 문자 때문에 자기 문자가 없어졌고, 일본은 언어만 있지 문자는 없다.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문화의 영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한글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이상봉 디자이너가 장사익 씨의 글씨를 사용해 옷을 만들었다. 세계는 한자와 다른 문자, 새로 나온 문자로 인식했고 아름답다는 찬사를 보냈다. 이것이 ‘한류’다. 현재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한류라 할 수 있다. 문화정체성을 가지고 철저하게 세계적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문화산업은 위태로운 산업이다. 돈을 한꺼번에 쏟아부어야 한다. 일반 산업과 다르다. 그래서 문화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금융전문가가 상당한 부분 포진돼 있어야 하며, 집중적인 지원으로 세계적인 콘텐츠를 만들어서 OSMU(One Source Multi User)를 극대화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문화콘텐츠 사업을 격상해서 국무총리 산하로 가는 게 좋다. 예산이 없다는 것보다는 목표를 가지고 예산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