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여행과 사색

승봉도 - 길이 아름다운 섬

이동권 2022. 9. 4. 15:20

승봉도 앞바다


원시의 향연이 무르익은 땅, 미지의 굴곡처럼 뻗어있는 길이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들녘을 따라 청신한 기분을 선사해주는 바닷바람이 불을 스치고 지나가자 이름 모를 애상이 엷은 파도처럼 가슴속에서 흐드러지게 일렁인다. 동서남북 어딜 보아도 이리저리 뒹구는 파도소리, 인정과 사랑에 젖게 하는 바닷물결, 수평선 끝없이 펼쳐진 해원을 따라 타오르는 낙조,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회 한 접시가 잃어버린 꿈과 낭만을 달래준다. 오랜만에 자연의 은빛 품 안에 안길 수 있는 여정이었다. 

나는 푸른빛 물결 위에서 은빛 보석이 반짝이고, 부드러운 뭉게구름이 신기한 풍광을 연출하는 승봉도에서 잠시 갈매기가 된듯한 자유를 만끽했다. 온갖 관계에 얽혀 이해득실과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는 것이 세속의 삶인지라 매양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제대로 마음의 중심을 잡고 살기 힘들다. 잠시나마 도시를 떠나 머릿속을 비우니 가슴을 짓누르는 매듭이 하나둘 풀리는 것 같다. 자신에게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자신밖에 없다. 하지만 자연과 교감하다 보면 좀 더 현명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역시 자연은 삶의 혼탁을 씻어내고 마음공부의 거울이 되게 하는 벗이자 스승이며 동반자다.

신록이 온 천지를 뒤덮고, 청초하고 고원한 빛의 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에는 어디를 가나 별천지요 선경이겠지만 잔잔한 물결을 따라 고독함에 정지된 채 메몰 된 세월을 꺼내볼 수 있는 색다름은 유독 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다. 특히 오전의 따스한 햇살을 받아 습한 향취가 사라지고 있는 갯바위에 서서 아득히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서로 돕지 못하고, 나누며 살지 못하면서도 으르렁대고만 있는 자신을 탓하는 마음 때문이다.

살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 정다움이 자연과 같이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물은 건너봐야 알고 사람은 오래 겪어봐야 됨됨이를 안다는 말이 있듯이 산이나 물처럼 사람도 믿음직스럽고 변함이 없어야 어루만지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별한 사람과 같은 자연을 만나기 위해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떠나는 자의 길은 아름답다고 어느 시인은 말하지 않았던가.

인천 연안부두. 9시 40분에 출발한 쾌속선은 이작도를 지나 승봉도로 향했다. 여행객들의 기대와 설렘을 안고,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이름 모를 섬들의 고독을 달래주면서 달렸다. 하루에 두 번 왕복하는 뱃시간을 맞추기 위해 이른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던 피곤함도 잠시, 나는 푸른 물결 위로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초여름의 정취에 한껏 빠져들었다. 

 

선착장


승봉도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포근한 햇살이 소리 없이 쏟아지는 승봉도에는 낯간지러운 어촌 마을의 향취가 넘실거렸고, 생성과 성숙과 소멸의 완벽한 리듬(밀물과 썰물)이 진행되고 있었다. 승봉도는 완만하고 수심이 낮지만, 서해의 다른 해수욕장과 달리 썰물 때도 갯벌이 보이지 않을 만큼 모래사장의 폭이 넓고 바위가 많았다. 서해이지만 남해와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낚싯대와 먹거리를 챙겨 이일레 해수욕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승봉도는 아름다웠다. 넉넉하게 자리잡은 마을을 따라 긴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수줍게 미소를 머금고 핀 꽃과 농부의 땀이 서린 밭작물들이 오묘한 조화를 이뤘다. 풍부한 해산물과 해변 가장자리에 즐비한 기암괴석들이 운치를 더했으며, 섬 가운데로 농가와 숲이 아우러져 있어 여행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풍성한 바다 어장은 갯바위낚시와 바다낚시를 만끽하러 온 어공들의 정열을 쏙 빼놓기 충분했다. 낚싯대 하나 둘러 던진 채 바위에 앉아 있으면, 자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것인지, 천금 보화와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인지 알게 된다.

한편으론 제 멋대로 쉬지 않고 가버리는 세월. 거센 파도에 이리저리 표류하다가 흘러간지도 모르게 주름진 눈 언저리를 보고 있노라면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기까지 긴 여로의 대명사는 곧 잘 주름살로 표현되게 마련이지만 헤치고 나아가야 할 질곡의 미래가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것 같아 입맛이 써졌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한 겨울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눈이 오는 곳에 여행을 떠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듯 화살같이 빠른 세월, 잠시나마 여유를 얻을 수 있는 여행이 늘 그립다. 

 

이일레 해수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