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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 허상과 몽환의 정원, 피터 그러너웨이 감독 1982년작

이동권 2022. 9. 4. 21:13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Draughtsman's Contract), 피터 그러너웨이(Peter Greenaway) 감독 1982년작


영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Draughtsman's Contract)'은 피터 그러너웨이라는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린 처녀작이다. 그는 최초의 장편영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을 발표하가 전까지 컬트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었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러닝타임이 4시간 20분짜리 대작이었지만, 국내에서는 1시간 48분으로 편집돼 상영됐다.

이 영화는 스토리 진행이 난해하다. 분명 허버트 백작을 죽인 범인을 찾는 추리 구조의 심리극이지만 영화의 진행을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대화는 범인을 찾기보다는 귀족사회의 저속함과 예술적 허상에 대한 비평으로 일관하며 딴청을 부린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것일까?

 

그러나 화가가 13번째 그림을 그리기 위해 등장하면서부터 '속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범인이 누군지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추리물 구조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면서 당시 지식인과 귀족사회에 내재한 위선과 속물근성을 조소하는데 치중한다. 

 

허버트 백작 부인과 정원


17세기 왕정복고 시대 직후의 영국 귀족, 허버트 부인은 집과 정원, 재산을 뽐내기 위해 정원을 그려줄 화가 네빌과 계약을 체결한다. 이 계약은 12장의 그림을 그리는 동안 네빌의 성적인 요구에 응하고, 그에게 적절한 돈도 줘야 한다는 특별하고 저속한 사항으로 돼 있다.

네빌은 허버트 부인의 성을 탐닉하면서 12장의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정원의 모습이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 극사실주의만이 최고라는 신념을 갖고 있던 그는 달라진 배경을 하나도 삭제하지 않고 똑같이 화폭에 담아낸다.

얼마 후 허버트 백작이 익사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네빌은 12장의 그림을 완성한 뒤 그곳을 떠나지만 사건의 단서는 풍경화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고, 익사한 장소에서 13번째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돌아온다. 하지만 허버트 백작의 부인과 딸은 백작의 죽음이나 그림에는 관심이 없고, 네빌에게 다시 성관계를 요구한다. 이들이 네빌에게 원했던 건, 그림이 아니라 허버트 백작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필요한 아이였다. 딸은 생식 불능이라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