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전제정치의 막바지에 이른 짜르 정부에 대항해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던 한 노동자의 어머니. 술주정뱅이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억압받으며 살았지만, 그는 뒤늦게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 아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스스로 운동가가 된다.
옳은 일이지만 위험한 길을 가는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맡겼던 '어머니'. 영화 <대지의 소금>을 보면 막심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에 등장하는 '빠벨'의 어머니가 떠오른다.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라고 부르짖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겼던 전태일 열사의 불꽃같은 삶도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평화시장의 참혹한 노동환경에 정면으로 맞섰던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투쟁 현장을 누볐던 그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는 영화 <대지의 소금>에 나오는 여인들과 너무도 닮았다.
영화 <대지의 소금>은 자본의 탄압과 폭력에 당당하게 싸우는 광산 노동자들의 '아내'이자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다. 남편을 대신해 굳건한 용기로 똘똘 뭉쳐 궐기하는 그들을 보면 언젠가는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꼭 올 것이라는 강한 희망에 사로잡힌다.
<대지의 소금>은 냉전 시기인 1950년대, 미국의 극단적 반공주의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사회주의 예술가들이 만든 영화이다. 1950년 당시 이탈리아에서 풍미했던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처럼 공산주의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그 시절 이 영화는 전국의 모든 극장에서 상영을 거부당했지만, 훗날 이 영화는 '후세에게 물려줄 소장영화 100편'에 꼽혀 연방의회 도서관 '명화의 전당'에 들어가게 됐다.
이 영화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함께 인종, 계급, 여성 문제 등등 미국 사회에 깊숙이 잠복해 있던 모든 구조적인 문제들을 드러내면서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영화에는 실제뉴멕시코에서 일하는 광산 노동자와 그 아내들이 연기자로 참여해 사실감을 높였고, 사랑과 희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관객들에게 각인시켰다.
사회성 짙은 영화는 영화의 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든다. 사회변혁과 진보적 가치 실현을 위한 도구로서 영화를 눈여겨보게 한다. 어떤 영화는 상업영화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부족해 보이지만 변혁의 도구로 제작되는 영화를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까지는 없다. 적어도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해가기를 바라는 열정과 헌신을 인정해야 하며, 감독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제작했을지도 살펴봐야 한다.
뉴멕시코주 실버시티의 아연 광산에는 괴이하기 짝이 없는 자본의 폭력이 생산되고 있었다. 잇따르는 광부 매몰사고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업주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멕시코계 광부들은 파업을 시작했지만, 자본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무마시키기 위해 쉴 새 없는 공세를 펼친다.
이 지역의 원주민인 멕시코인들은 뉴멕시코가 미국에 팔린 뒤 자기 나라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이 부분은 이 영화가 스스로 저항성을 띄고 있음을 공간적으로 보여준다.) 이곳 원주민들은 백인 광산회사들과 지역 경찰의 횡포에 시달리며 힘겨운 일상을 보낸다. 마치 죄를 짓고 유배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자본의 손아귀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광부들은 매몰사고를 겪으면서 '더 이상 짐승처럼 살 수는 없다'며 파업을 결행하고 가열찬 투쟁에 나선다. 하지만 이들의 파업은 자본의 무력탄압과 회유에 술에 물 탄 듯 지리멸렬해지는데, 이를 참지 못한 광부의 아내들이 파업 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남편들의 파업이 법원으로부터 금지명령을 받자 자신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온다.
이 여인들은 전통적인 가톨릭 문화 속에서 애를 낳아 기르며 가부장적인 남성들에게 기죽어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가장 열렬한 운동가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경찰들이 무력을 동원해 막아보려 해도 빈곤과 여성차별에 시달려온 이 여인들의 분노를 막아내지 못한다.
자본의 폭력에 대항해 시위를 벌이는 아내들이 감옥에 가자 남편들이 대신해서 아이들을 돌본다. 빨래도 하고, 음식도 만들면서 비로소 아내들이 요구했던 '수도 시설'의 절박함도 알게 되며, 가사를 돌보는 일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된다. 특히 남편들은 자신들의 뒤치닥꺼리나 하면서 기죽어 지냈던 아내들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알게 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아울러 여인들은 파업 투쟁에 참가하면서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회복되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 부분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여인들이 간직한 '한'의 부피에 눌려버리고 말았다.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이 암전된 뒤에는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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