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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구두 - 애절한 귀향, 여균동 감독 2006년작

이동권 2022. 9. 4. 21:33

비단구두, 여균동 감독 2006년작


'너에게 나를 보낸다'로 유명세를 치른 여균동 감독의 영화 '비단구두'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사채업을 하는 깡패 아들이 삼류 영화감독에게 가짜 방북 프로젝트를 의뢰한다는 코미디물이다. 

 

이 영화는 총 3억 원의 저예산으로 완성됐다. 때문에 배우들은 틈틈이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스태프로 참여하는 등 연기자와 제작진이 모두 1인 2역을 소화해야 했다. 그러나 '비단구두'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제작사가 임금을 지불하지 못하자 스태프들이 여균동 감독의 개인 재산에 가압류를 신청하기도 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오리영화사의 대표는 여균동 감독이었다.)

 

영화 '비단구두'에는 낯설지 않은 화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80년대 민중운동을 주도하면서 반정부 투쟁에 앞장섰던 민정기 화백이 그 주인공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로 등장한 민 화백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적 모순과 삶의 구조들을 날카롭게 형상해왔다. 

영화 '비단구두'는 깊고, 넓고,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차용해,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감독의 생각은 무척 신선하고 상쾌했다. 

아버지를 고향에 보내드리고 싶은 조폭의 효심은 비록 난폭하고 무식했지만 참으로 아름다웠다. 마치 통일을 염원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냄새가 넘쳐나는 설정이었다. 조폭의 부하 성철이 보여주는 인간미는 이 영화에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했다. 시종일관 조폭의 거친 모습은 드러났지만 그 안에서 풍겨 나오는 인간미는 관객들의 마음을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리고도 남았다. 마지막 부분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연인을 만나 행복을 맛보는 배 영감의 모습은 너무도 애절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벽 가로막혀 있는 것 같은 답답함도 느껴졌다. 치매노인과 조폭이 생산하는 인공적이고 도식적인 웃음과 실향민의 절절한 아픔을 뿌리 속까지 드러내지 못한 '내공' 때문이었다. 특히 만수가 만들어내는 억지스러운 '웃음'은 웃음 이전에 동감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꿈에 그리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꽃분이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배 영감의 아픔이 희석된 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차라리 치매 노인이 아니었으면 어떠했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게 했다.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러니까 가슴을 짓누르는 슬픔 때문에 치매에 걸린 척 살아가는 노인을 통해 분단의 아픔을 전면적으로 들고 나오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주연배우들


자신의 영화가 흥행에 참패한 뒤 의기소침한 만수는 여행을 꿈꾼다. 하지만 그에게는 돈이 없다. 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자가 빚을 견디다 못해 도망가 그 빚은 고스란히 만수가 지게 된다.

 

어느 날 사채업자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사채업자는 빚을 탕감해주는 대신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협박한다. 만수는 자신은 돈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항변하지만 강압에 못 이겨 사채업자의 아버지를 데리고 북으로 가는 영화를 만들게 된다.

만수는 사채업자의 아버지를 데리고 북(가짜)으로 향한다. 효심이 가득한 사채업자는 자신의 충복 성철을 동행시켜 이 프로젝트를 감시하게 한다. 북측으로 넘어가는 길목은 판문점. 하지만 만수는 판문점 대신 서울영화촬영소에 있는 세트장을 이용하고, 엑스트라 배우들을 북측 사람들로 분장시켜 노인이 북에 도착한 것으로 속인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면서 일음 점점 꼬여간다. 마지막 강원도 산골 마을을 개마고원으로 바꾸고 배 영감을 속아 넘기려는 일행들. 그러나 갑자기 벌어진 서바이벌 게임 때문에 전쟁이 난 것으로 착각한 배 영감은 헐레벌떡 도망가고 산골을 헤매다 또 한 명의 치매에 걸린 노인을 만난다. 배 영감은 그 노인을 꽃분이라고 생각하는데...

한편 만수와 성철은 배 영감을 잃어버리고 낙담하다가 경찰에 쫓겨 컨테이너에 숨는다. 이 컨테이너는 북으로 가는 화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