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생각나무

각박한 세상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소주

이동권 2022. 9. 4. 15:49

삶이란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것이고
스스로 기쁨과 슬픔을 다스리는 치유력도 생기게 마련이지만
가끔은 유쾌하고 탁월한 기교가 필요한 날도 찾아온다.
감미로운 술 한 잔이 그리운 날이...

<밥줄이야기 중에서>

 

마을 주민과 원샷하는 고 노무현 대통령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거나 절친한 벗이 그리울 때, 추위 때문에 몸에 한기가 돌거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 겹겹이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싶을 때 소주가 생각난다. 굶주린 뱃속이 요동치거나 쓴 맛이 입가에서 맴돌 때, 노을진 하늘을 날며 울어대는 새들의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거나 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살갗을 간지럽힐 때, 고향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싶거나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을 만나 유쾌한 기분이 들 때, 언제 어디에서나 편안한 휴식을 선사했던 음악처럼 소주가 떠오른다. 특히 가을날 마른 잎 하나가 무릎 위로 떨어지거나 세상 사는 모양이 세련되지 못해 옥신각신 부딪칠 때 생각나는 것은 소주밖에 없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소주를 자주 마신다. 그냥 한 잔 털어 넣고 무엇이 문제인지 성찰하는 과정 속에서 의문이 자연스럽게 풀리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소주는 가끔 나에게 솔직한 경고를 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소주를 즐긴다. 단지 값이 싸고 구하기 편해서가 아니다. 비싼 양주보다 소주가 입에 잘 맞는다. 어떤 이들은 혀와 간장을 '찡하게' 울리는 소주의 쓴 맛 때문에 손사래부터 치지만 소주의 맛을 감미하면서 마시다 보면 소주가 무척 달고 뜨거운 성질의 것임을 알 수 있다.

푸른빛이 도는 소주병이 주는 청량감과 깨끗함도 좋아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는 속담처럼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의 기분을 느끼게 하는 소주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갖 잡념이 한방에 날아간다. 특히 푸른색 병 안에서 소주가 출렁이는 모습은 '카타르시스' 그 자체다. 또 테이블 위에 한 병 두 병 쌓여가는 빈병들을 보면 통쾌함을 느낀다. 이를 두고 변태라고 하면 할 말 없다. 단지 그 기분이 작은 봉우리를 넘어 또 다른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는 산악인처럼 뿌듯함을 느낀다.

나는 술자리로 인간관계를 쌓을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넉넉하게 마음을 나누며 살기 어려운 현대사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털어놓거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자리는 술자리만 한 게 없다. 함께 따르고 나누는 예절 속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도 배운다. 그렇지만 술이 정신적인 피로감이나 얽힌 인간관계를 풀어주는 묘약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단 술이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수단' 정도는 되기 때문에 피할 필요는 없다.

 

(조선시대부터 서민들이 즐겨하던 소주는 도수가 좀 높아 술에 취하다 보면 흉금 없는 대화와 충고가 가능했다. 크게 실수를 하더라도 서로 간의 신뢰가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격식을 벗어나는 자유로움도 느끼게 했다.)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소주 원샷 때리는 가수 싸이


인생의 쓴 맛을 알게 하는 데는 소주가 제격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소주는 원래부터 쓰지 않다고 생각하며, 소주가 마음을 흥분하게 만들기 때문에 불안하거나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을 때는 마시지 않는다. 그럴 때는 억지로 들이부어도 들어가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술이 자연스럽게 생각난다고 한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전혀 술이 당기지 않는다. 술이 좋아 마시는 술이지만 아무하고나 술자리를 갖지 않으며, 함께 술자리를 가져도 술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말짱 '꽝'이 된다. 하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술은 인간의 정취와 여유, 느긋함과 사랑을 느끼게 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 기쁜 마음으로 마음을 통하고, '원샷' 혹은 '완샷' 외치며 입속에 털어 넣는 술잔에 거창한 이유나 용기를 달겠는가. 

중국 고사에 '독한 술을 10번 이상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먹고살기에도 바쁜 요즘 세상살이에 비춰보면 10번이라는 횟수가 '과하다' 싶은 생각이 들지만, 왜 이런 이야기가 내려오는지 짐작이 간다. 자신을 깊게 내어놓고,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누는 기회가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우리의 곁에서 넉넉한 벗이 돼 주었던 소주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양주의 물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건하게 지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또한 각박한 세상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매파'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