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선 혁명가와 국가권력의 자화상
오해를 무릅쓰고 한 소녀의 죽음에 전적으로 수긍해야 함을 느낀다. 그토록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했던 소녀.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택한 죽음. 길가에 쓰러진 꽃을 세워주고 싶은 마음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녀의 죽음 앞에서는 한 없이 힘이 빠진다.
돼지처럼 서로의 육체를 탐했던 9인의 남녀를 죽인 소년의 날카로운 칼끝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옥상에서 펼쳐지는 죽음의 전주곡은 차라리 탐스럽고 영롱하다. 소년이 보여주는 '자아의 과잉'은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키워가는 모습을 거울처럼 반사하면서 스스로 생명을 처단하는 기계가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독약이 된다.
소년은 '와카마츠 코지' 감독의 마음을 대변한 것 같다. 스스로 '혁명가'라는 '자아의 과잉'이 부르는 욕망과 비관, 염세를 충고한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슬픔은 칼을 쥐고 있는 자, 살아있음으로 웃고 있는 자라는 것이다. 아... 참으로 괴롭고 고독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코지 감독은 가난과 역경은 내면의 수양에 따라 다르고, 진정한 인연을 만남으로써 경감될 수 있다는 메시지도 칼을 쥔 한 소년을 통해 전달한다. 소녀의 순수한 사랑과 그 사랑을 믿을 수 없다는 소년의 절박한 사랑을 보면서 감독 스스로 진정한 인연과 동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섹스를 원하는 소녀와 섹스를 해본 적도 없고 재주도 없다며 거부하는 소년. 둘은 끝내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면서 사랑을 완성한다.
이 영화는 경건함도, 망설임도 없이 죽음을 선택하는 국가권력의 실체도 드러낸다.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칼을 빼들고 살인을 저지르며 생지옥을 연출하는 그들에게 스스로 자결하기를 권고한다. 자기 맘에 맞지 않고, 맘대로 되지 않으면 '애국'이라는 명분으로 참혹한 결단을 내리고 마는 힘 있는 자들. 그들이 읊어대는 황당한 논리를 지켜보면서 80년 광주가 갑작스레 떠오른다.
한 소년이 8층 건물 옥상에서 4명의 남자가 한 소녀를 윤간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소년의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다. 아마도 손목에 칼을 댄 듯하다.
농염한 음악과 함께 소녀의 입에서 스며나오는 야릇한 분노. '싫어요'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그녀는 깊은 잠을 청한다. 이미 그녀의 성은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참혹한 도회지의 절망과 좌절이 숨 쉬고 있다. 그녀의 자궁에서 흘러나오는 피도 혁명의 피가 아닌 자본의 피비린내일 뿐.
아침, 그리고 옥상. 빨래를 너는 여인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인 옥상은 밀실로 그려지며 도회지의 차가운 익명성을 보여준다. 이 부분은 코지 감독의 실험적인 접근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잠에서 깬 그녀. 첫 번째 처녀일 때를 생각한다. 푸른 바다가 펼쳐진 해변가에서 누군가에 쫓겨 도망가다가 잔인하게 윤간을 당한다. 포말을 일렁이는 파도만이 그녀의 슬픔을 아는 듯 거대하게 클로즈업돼 화면을 덮치고, 다시 옥상 위의 그녀는 누워있다. 굉음처럼, 처절한 울분처럼 비는 쏟아진다.
"저는 두번째 처녀예요. 두 번째 강간을 당했거든요."
"죽고 싶어요. 내 몸은 남자가 선택한 최고의 걸작이에요. 저를 죽여주세요."
혁명가가 첫번째 처녀라면, 쓰러진 혁명가는 두 번째 처녀다. 혁명가의 이름으로 (국가권력에게) 강간을 당했던 그녀가 첫 번째 처녀였다면, 어제의 동지가 도회지의 건물 옥상 콘크리트 바닥에 흘린 피는 그야말로 강간인 셈. 이는 일본의 혁명 과정에서 우경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서버린 '혁명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녀는 소년과 함께 건물 지하실로 향한다. 이곳이야 말로 음침하고 습기 나는 곳이지만 신성함을 담고 있다. 이곳에서 그녀는 섹스를 원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그리고 그는 답답해하는 그녀를 위해 5층으로 향한다.
거기에는 벌거벗은 남녀 4명이 바닥에 피를 쏟아낸 채 죽어있다. 이들은 소년이 죽인 사람들. 그들은 완력을 이용해 소년을 성적인 노리개로 이용했고, 돼지처럼 성욕을 불태웠다. 이를 참지 못한 소년은 그들에게 비수를 꽂았다.
소년은 소녀에게 자신을 강간했던 그들을 처단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을 죽여달라는 말만 되뇔 뿐이다.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나머지 치욕마저도 잊는다.
다시 세상이 어두워지자 소년은 불량배들을 죽이고 둘은 함께 옥상에 머무른다. 새벽이 되자 이들은 건물 아래로 뛰어내린다.
엄마, 나는 나가요.
이제 엄마 앞에 관광버스가 서고 뻐꾸기가 울거에요.
차입금도 안들여보맨 D판사...
뜨겁게 발기한 새빨간 네온도 뜨겁지 않아...
이젠 경찰의 정원.
감시당하는 나의 거실.
감시당하는 나의 커피.
다시는 보지 말아.
'이야기 + > 와카마츠 코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⑤와카마츠 코지 - [리뷰] 더렵혀진 백의, 1967년작 (0) | 2022.09.03 |
---|---|
④와카마츠 코지 - [리뷰] 벽속의 비사, 1965년작 (0) | 2022.09.03 |
②와카마츠 코지 - [인터뷰]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0) | 2022.09.03 |
①와카마츠 코지 - 그는 누구인가? (0) | 2022.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