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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와카마츠 코지 - [리뷰] 벽속의 비사, 1965년작

이동권 2022. 9. 3. 16:43

벽속의 비사(Secrets Behind the Wall), 와카마츠 코지(Wakamatsu Koji) 감독 1965년작


혁명가의 기만과 성장 제일주의에의 종말

아파트 벽속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수험생. 그에게 있어 창문 너머로 몰래 엿보는 세상은 애정 어린 기쁨이자 음란한 취미생활이다. 협착한 세계관에서 나오는 증오와 혹독함이야말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재단하기 위해 와카마츠 코지 감독이 필요로 하는 대상. 수험생은 이 영화에서 선악을 판가름하고 형벌을 가하는 주체로 나선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수험생이 망원경으로 투시하면서 들려주는 일본은 기발하고 참신하면서도 로망 포르노식의 표현법을 제대로 살린다. 이 영화는 이 학생의 '병적인 관음증'으로 기만적인 혁명가의 일상과 성장 제일주의가 판치는 일본 사회의 무력함을 고발한다. 주제의식을 극도로 부각하는 이런 연출기법은 시퍼런 칼을 들고 설치거나 핏발을 세우고 말싸움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고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생명의 소중함과 존엄성의 진멸을 느끼게 한다. 일본이 주창하는 국가 우선주의, 성장 제일주의는 개개인의 생존에 대한 의식마저도 탈구해버리는 것. 이 영화에서 창문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벽속의 일상, 수다스러운 여자, 음산한 음악 등으로 희화된 부분들을 보면 국가와 성장에 매몰된 상황에서, 개인의 삶은 그저 낯설고 흥클어져 떠다니는 바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벽속의 비사>는 독일 수입사가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하면서 국제적으로 알려졌으며, 자국에서 일본을 욕보인 작품이라고 냉대를 당했다.

정사를 나누는 장면


"당신은 히로시마. 평화와 반전의 상징이에요."
"당신을 사랑하는 한 전쟁을 절대로 잊지 않을 거예요"

한 여자가 옛 애인과 정사를 나누면서 말한다. 그리고 화면은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하늘로 솟아오른 버섯구름. 도망가는 사람들. 원폭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겹치면서 다시 둘만의 침대로 클로즈업된다.

아파트 단지 건너편에서 망원경으로 이를 지켜보는 학생. 그는 이들의 행각을 몰래 훔쳐보며 자위행위를 한다. 기만적인 혁명가의 일상을 '욕망의 쓰레기'로 간주하면서 '음란한 배설'을 실행한다.

망원경으로 보이는 두 남녀는 원폭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남자와 다른 남자의 아내인 유부녀다. 한마디로 불륜이다. 하지만 히로시마의 원폭의 상처와 절대적인 평화를 외치는 이들에게는 불륜까지도 순화돼 버린다. 죄의식마저 잃게 만든다. 그래서 이들이 '평화를 사수하고 자위대의 발호를 막아야 한다'고 외치면서 입과 살을 섞는 순간에는 자연스럽게 이맛살을 찡그리게 된다. 이는 '관음증'에 빠진 학생의 눈에도 마찬가지. 이들의 기만은 역겨운 냄새를 풍길뿐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여자와 돈과 명예 뿐이다.

학생은 기만적인 혁명가의 모습, 그리고 성장 제일주의에 메몰된 일본을 고발하는 의식을 치른다. 그를 죽이고 그녀를 욕보인 뒤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