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 신부의 한 손에는 늘 분신처럼 지팡이가 들려있다. 한쪽 다리를 절어야 하는 그에게 지팡이는 신체 일부분이자 때로는 유용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야 하는 삶을 산 지도 어느덧 50여 년.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간을 거슬러 1975년으로 돌아가면 문 신부가 왜 다리를 절게 됐는지 알 수 있다.
1975년 4월 7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고 관련 피고인 8명에게 사형을 내린 뒤 다음날 새벽 전격적으로 형 집행을 단행했다.
"4월 8일 인혁당 사건 재판에 참관하는 일이 엄격하게 저지돼 참석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변호사와 BBC 방송국 기자의 안내인 자격으로 법정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제가 법정에 들어갔을 때는 어떻게 재판이 진행됐는지도 모르게 사형 확정 판결이 내려졌고, 가족들은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항의하던 저는 법정에서 강제로 끌려 나오게 됐지요. 그리고 다음날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된 뒤 유족들의 연락을 받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서울 구치소에 갔습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계되지 않고 구치소 후문으로 몰래 탈취되었습니다. 고문 조작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시신을 화장시키려고 꾸민 일이지요. 저는 황급히 응암동 로터리로 따라가서 송상진 씨의 영구차를 잡았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500여 명의 경찰들에게 시신을 탈취당하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습니다. 그 당시에 저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함석헌 선생, 윤보선 씨 부인, 문익환 목사님 부인 등 30여 명. 또 많은 시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경찰들이 영구차를 끌고 가기 위해 견인차를 몰고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경비들에게 잡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릎을 다쳐 지금까지 다리를 절고 있습니다."
온몸을 던진 문정현 신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송상진 씨의 시신은 벽제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유신체제는 이날 고려대 시위를 구실로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고 휴교령과 함께 학교에 군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서울대 김상진 학생이 반유신 집회에서 할복 자결하는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높아지자 유신체제는 5월 13일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송상진 씨의 시신을 탈취당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수병 씨의 시신은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인을 녹번동 자택으로 모셔와 검시를 진행했습니다. 시노트 신부님과 최분도 신부님의 주선으로 미 8군 군의관들이 검시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수병 씨의 몸에는 고문당한 흔적이 상당했습니다. 왜 그들이 가족들의 면회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수병 씨 검시 사진은 함세웅 신부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수병 씨의 사진을 보면 손톱 발톱 부분, 발뒤꿈치, 아킬레스건은 모두 새까맣게 타 있다. 철판에 눕혀놓고 전기고문을 했는지 등과 허리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체포돼 1년이 지나 사형을 당했지만, 혹독한 고문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 중앙정보부의 고문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족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감시당하고 탄압을 받았습니다. 고인의 묘비도 캐버렸고, 부인들은 정보부에 끌려가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중앙정보부 사람들은 정보 조작능력이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누구누구는 공산주의자'라고 유포하고 사실이 아닌 죄를 뒤집어씌우기도 했습니다. 인혁당 사건으로 숨진 하재완 씨 아이들 같은 경우는 동네 전신주에 묶어놓고 빨갱이들은 때려죽여야 한다고 겁을 주기도 했고 김OO 씨 부인은 안기부에 끌려가서 모질게 구타당한 후 목이 타서 마신 물에 흥분제가 들어있었는지 여자로서는 남자들 앞에서 할 수 없는 짓도 하고 그랬습니다. 풀려난 후에는 독약을 사들고 집에 들어가 아이들과 함께 죽으려고 했으나 마침 친정어머니가 와서 죽음을 모면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당한 고통은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문정현 신부는 목이 멘 소리로 흐느끼면서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제작한 암흑 속의 횃불 8권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휘 아래 자행된 '간첩 만들기'의 실체가 지난 2005년 밝혀졌다.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이날의 진실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중앙정보부 격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의 공식적인 조사에 의해 발표된 것이다.
"진실위가 중앙정보부의 간첩조작 사건을 밝혀낸 것이 아니라 인제서야 공식적으로 시인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간첩을 만들고, 정치적인 부담 때문에 사형 선고를 내렸던 국가정보기관이 자체 조사를 통해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발표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긴 합니다. 주교 인권위원회에서 대법원에 청구한 재심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의미는 다릅니다.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돼야만 진상이 규명되고 명예회복과 보상이 있습니다. 진실이 밝혀지는 것만으로는 명예회복과 보상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유족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애초부터 보상은 불가능한 일이죠."
(2015년 '1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 고 도예종 씨 등 9명이 재심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1965년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지 50년 만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북한의 지령을 받아 반정부 조직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수십 명의 재야운동가들을 잡아들였다. 이들 중 13명은 재판에 넘겨져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도 씨 등 8명에 사형을 선고했고, 사형을 선고한 지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하는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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