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아크릴 물감이 하얀 천속으로 스며든다. 그의 눈빛과 붓이 오고 갈 때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과 절규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깊고 깊게 농담을 더해가며 물들어 간다. 하지만 그 검은빛은 더러운 자본과 완전한 결별을 선언함과 동시에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는 듯 뜨겁다.
애니메이션 노조위원장이자 문화예술노조 수석부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류재운 위원장을 만났다. 2005년 현대 하이스코 투쟁이 한창일 때였다. 그는 민주노총 빈 사무실에서 한쪽 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는 노동자가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걸개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류재운 위원장은 여의도에서 특수고용직노조 단식농성투쟁에 들어선 지 단 하루 만에 단식을 풀고 나와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하이스코 비정규 투쟁 때문이다. 걸개그림을 다 그리면 다시 여의도 농성자에 합류할 예정이다.
"우리나라는 H가 문제입니다. 하이닉스, 하이스코, 하이텍알시디코리아... 한국도 H로 시작하잖아요. 자본가들이 오히려 노동자에게 치밀하고 교묘하게 계급 전쟁을 걸어왔습니다. 하이스코 동지들이 물리적으로 자본의 침탈을 막았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입니다. 노동자들이 대화를 통해서 풀자고 하는데, 물과 전기까지 끊는 자본가의 악랄한 모습은 지탄받아 마땅하죠. 죽일 놈의 새끼들입니다. 현대 하이스코 싸움은 우리들에게 매우 모범적이고 상징적인 싸움입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납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무실 바닥에는 빈 소주병 3개, 침낭과 슬리퍼가 있었다.
"직업병입니다. 알코올 중독 때문에 손을 떨거든요. 술을 마셔야 그림을 그립니다. 그래야 손도 안 떨리지요. 보통은 공동 작업을 하는데, 함께 그림을 그렸던 친구가 바쁘다고 해서 혼자 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에 밤에도 조금 쌀쌀합니다."
알코올 중독,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 대한 분노였다. 단지 현실의 우울함을 술로 핑계 삼아 웃어버리는 예술가의 기질과는 다른 것이었다.
"아직까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디자이너나 영화계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큰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민주노총이 위기라고 하는데, 많은 동지들이 흔들리지 말고 자신이 속한 현장에서 조직화 사업에 열중하면 반드시 우리의 길은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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