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어둠이 내린 협곡. 끊임없이 이어진 낭떠러지. 음산한 하늘을 울리는 메아리. 데빌 돌의 음악을 감상할 때마다 생각나는 이미지다. 마치 현실에서 지옥을 체험하는 느낌이다. 이 오싹함의 정체는 날카로운 바이올린과 기타 선율, 강렬한 드럼 베이스 때문이다. 특히 노랫말이 정점이다.
While on the surface
Light and shade take turns
And smile and tears
And fair and ugly
Saint and nasty
And the monstrous
Is just the different:
Tiny crack in the globe's perfection
이탈리아 출신 Art Rock의 대표주자 데빌 돌은 주변의 모든 사물을 악기로 사용한다. 여기에 악마 같은 목소리와 전위적인 클래식 음률이 더해지면 한 곡의 충격적인 서사시가 만들어진다. 보통 20여 분이 넘는 곡들이며, 3집 Sacrilegium(신성모독)에는 58분이 넘는 곡도 있다. 노래가 길다고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노래에는 그것에만 주목하게 만드는 특별한 힘이 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잠시 귀를 기울이면 곡의 속도, 볼륨, 유형 등을 자유롭게 변화시킨 음악 속에 빠져들고 만다. 마치 데빌 돌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음악의 탄탄한 구성과 함께 철학적인 가사는 이들의 음악에 더욱 깊고 진중한 힘이 숨겨져 있음을 느끼게 한다.
데빌 돌의 음악 중 가장 추천하고 싶은 음악은 1990년에 발표한 2집, 러닝타임 24분 43초의 "Eliogabalus"이다. 이 음악을 감상하는 포인트는 먼저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이중창을 따라 보컬의 목소리를 거부감 없이 느끼다가 서정시를 읊는 마음으로 깊은 곳에 감춰 놓은 자신의 영혼과 조우하면 된다. 그리고 어느 미친 남자의 혼잣말처럼 오버랩되는 가사들을 모두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는 것과 같이 모호하게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 곡은 '나렌쉬프(Narrenshiff)'의 이야기다. 삶과 죽음의 중간지대에서 사는 광인(狂人)들이 나렌쉬프의 배에 감금되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방랑한다는 내용이다. 삶과 죽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 그것은 미친 자들이 사회적으로 겪는 고통이면서도, 그것만이 유일하게 자아성을 인식하는 실체이자 즐거움임을 인정한다는 뜻이겠다.
데빌 돌은 스스로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들만이 나렌쉬프의 배에 승선할 수 있는 영혼이라고 말하면서 미친 사회를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치유하고자 한다. 광기로 무장하고 미쳐버리자고 말이다.
이들의 3집 노랫말은 더욱 전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러 퍼지고 장례식이 거행된다. 누가 죽었을까? 아니다. 땅속에 매장되는 사람은 아직도 심장이 뛰는 사람이다. 그는 왜 생매장당하는 것일까? 그가 바로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이며, 그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신은 살았을지 모르지만 신의 정신은 이미 죽었다면서.
데빌 돌의 음악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은 히치콕 영화의 음악을 작곡했던 버나드 허먼이다.
나도 공포영화를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가장 쉽게 발견하곤 한다. 모든 전쟁과 살육의 근본에는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된 폭력적 본성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봤다. 사회적, 물리적, 육체적인 강자가 되면 나타나는 핏빛 본성의 실체.
데빌 돌의 앨범 뒷장에는 "This music can alter your mental health"라고 쓰여 있다. 당신의 정신건강을 해칠 수 있는 음악이라고 말이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이미 Mr. Doctor의 음악을 듣기 위한 준비가 됐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러닝 타임이 1시간 20분에 육박하는 The Sacrilege Of Fatal Arms를 듣기 위해서는 이 글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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