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한 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랄까, 간혹 전혀 몰랐다거나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던 분야의 일을 천직으로 삼게 되는 일이 있다. 이지산 씨도 그렇게 삶을 발견하고 개척한 무용가였다. 그는 탈춤과 막걸리를 좋아하는 대학생이었고, 부조리한 세상과 맞서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전통춤을 공부하고, 우리 춤을 지켜내는 파수꾼이 되고, 후학들을 견인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될 줄은 자신조차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예술가란 본래 신분이나 혈통과 관계없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통해 아름다운 매력을 발산하게 되는 법. 그가 무대에서 펼쳐내는 청아한 기품과 본능적인 끼, 극도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예술적 재치를 풀어내는 그의 미적 감각을 생각한다면, 그가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뛰어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다소 억측이다.
하지만 그런 연유로, 그를 도와줄 연줄이나 예술적 토양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번 사는 인생, 춤에 인생을 걸어보겠다는 다짐밖에 없는 그런 사내였다. 그래서 그는 실타래처럼 얽힌 삶의 비화에 휘말린다거나 억울하고 분한 일에 몰리더라도 스스로 인내하고 풀어내야 했으며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일에도 기꺼이 마주 앉아 감내해야 했다. 때론 스핑크스처럼 신비로운 미소로 고달픈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을 간절한 소원으로 바꿔내야만 했다.
"제 삶과 춤은 전화번호부에서 찾았습니다. 한마디로 '전화번호부 인생'이었지요. 춤을 배울 길 없어 무작정 민예총에 전화했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춤을 배워야 할지 몰랐으니까요. 그분들이 '춤세상'이라는 곳을 찾아가라고 하더군요...양산학춤도 전화를 걸어 배우게 된 경우입니다. 제 주변에 춤을 추는 사람이 없어서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는데, 전화가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 셈입니다."
어릴 때부터 춤을 배웠던 사람이라면 부아를 돋우는 예술적 갈망을 풀어내기에도 바빴을 나이, 하지만 그에게는 춤을 어디에서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풀이 죽거나 좌절하지 않고 힘든 시기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말이 그렇지, 무작정 전화해서 춤을 배우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예술가의 길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음을 모르고 섣부르게 뛰어든 젊은이의 철없는 행동으로 보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전화번호부 인생, 목마른 열정을 뒷받침해주는 이런 성실함이 있었기에 오늘의 그가 있었다는 확신을 내리게 됐다.
"저는 춤을 전혀 몰랐습니다. 춤을 추겠다는 생각도 못했지요. 단지 춤을 췄던 두 번의 경험이 있었을 뿐인데, 저를 그 세계로 빠져들게 하고 말았지요. 첫 번째 춤을 추면서 춤이 주는 희열감을 알게 됐습니다. 세계민속예술축전 한국팀 공연단에서 춤을 췄는데, 가슴속에서 뜨겁게 끓어오르는 희열감 같은 것이 느껴지더군요. 두 번째 춤은 저에게 마음의 울림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91년도 안동대 김영균, 전남대 박승희, 경원대 천세용 열사 등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던 분신정국 때, 성남 시청 앞 집회에서 천세용 열사의 추모 춤을 췄습니다. 열사의 춤을 춘다는 것, 진실과 마주하면서 느껴왔던 그 마음의 울림, 그 가슴 찡한 경험을 지금도 잊을 수 없지요."
그를 춤으로 이끌었던 원인은 남다른 것이었다. 배움의 길에 접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선망하는 유명인의 뒤를 밟길 원한다. 고급 비단이 깔린 넓은 집에서 안락한 삶을 꿈꾸며 존경받는 이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아니었다. 그의 길에는 멋진 장신구도, 나들이옷도 필요 없이 춤에 대한 열정만을 가득 안고 시작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 춤을 지켜나가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길 원했고, 후학들이 새로운 춤을 창조해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원동력이 되길 자처했으며, 사람들이 우리의 전통춤에 감탄하고 좋아하게 만드는 알짜배기 스타가 되고자 한 것이었다.
"저는 남들과 다르게 질풍노도의 시기가 늦었습니다. '왜 살아야 하나',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의미가 뭘까'에 대해 2년 정도 고민하다가 춤에 대한 두 번의 기억이 저를 춤을 추도록 만들었지요."
매일매일 쉽고 편안한 길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어렵고도 모진 역경으로 인도하는 춤의 유혹을 견뎌내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더욱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에게는 초라한 집에서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살아도 괴로움의 씨앗을 잉태하는 춤의 손짓을 거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라는 생각 말이다.
이지산 씨에게 우리 춤이 대중들에게 새롭게 자리매김하면서 세계적인 문화산업으로 지평을 열어갈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전통은 민족의 정체성입니다.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큰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세계적인 춤이 됩니다. 마당극도 대형프로젝트화해서 규모 있게 제작해야 합니다. 내용은 간단하면서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요. 예술을 고급화해서 상품으로 만들 필요도 있습니다. 일본의 예술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국보'로 고급화했고 세계적인 상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듯 단순하게 우리 춤이나 춤추는 사람들을 무형문화재나 예능보유자 정도로 생각하면 대중화나 세계적인 문화로 키워내는 것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그는 경상도의 덧배기춤을 소개했다. 이 춤은 경상도 지방에서 덧배기장단에 추는 춤으로서, 그 안에 대표적인 품사위가 배김새이며 잔가락이 많아 흥겨운 춤이다. 양반이 추는 춤과 문둥이, 말뚝이가 추는 춤으로 나뉘며 대중놀이로서는 의의가 큰 춤이다.
"힘 있고 박진감 넘치며 역동적인 춤이 경상도에 남아 있습니다. 덧배기춤이라면 충분히 대중화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밀양백중놀이 중에서 이미 맥이 끊어진 떨떨이춤(몸을 떠는 사람의 춤), 병신춤 등이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그것을 꼭 살려야 합니다. 특히 병신춤은 우리 춤의 총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많았고, 그것이 우리 이웃들의 삶이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요."
우리 춤에는 주류 계층의 문화와 비주류 계층의 문화로 나뉘어 발전해 왔다. 이 사정은 현재의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제도권 교육은 승무나 한량무, 살풀이 등의 춤이 주를 이룬다. 이는 우리 춤이 주류의 문화를 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증명한다.
"우리 춤이 기방에 들어가면서 기형화된 모습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만, 민속적인 측면에서 우리 춤을 봐야 합니다. 굳이 나눌 필요까지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 춤은 양반 또는 중인들에 의해서 열어지는 판이 많았고 그 안에서 민중들이 즐겼습니다. 사회적으로 억압받았던 민중들은 춤을 추면서 양반들의 흉을 보았고 한을 풀어 온 것이지요. 그렇지만, 궁중무용은 왕을 위한 것이므로 양반이냐, 민중이냐의 문제로 구분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자체로 민속예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하지요. 한량춤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기방에 들어가지 않은 춤은 마당극이나 밀양백중놀이 같은 굿, 탈춤 등이 있습니다. 통도사에서 스님들이 췄던 양산학춤도 그렇습니다."
밀양백중놀이는 천민들의 설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민속놀이다. 밀양백중놀이는 농신제를 시작으로 하여 작두말타기, 양반춤, 병신춤, 범부춤으로 이어지며, 양반을 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밀양은 유달리 양반과 중인, 천인의 계급차가 심한 곳이었다고 한다.
이지산 씨는 봉산탈춤, 양산학춤, 이매방류 승무 살풀이, 진도북놀이를 주로 한다. 그중에서도 봉산탈춤은 이지산 선생이 가장 잘 추는 춤 가운데 하나다. 봉산탈춤은 황해도 봉산 지방에서 전승돼 오던 가면극으로써, 1967년 중요무형문화제 제17호로 지정됐다.
우리 춤을 바라보는 정부나 대중의 역할은 무엇일까?
"정부는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중요성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자본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열정만으로 하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전통문화 발전의 몫을 관객들에게만 전가시킨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제도적인, 정책적인 지원과 인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전통문화는 한민족의 중요한 정신이라고 인식하는 것 말입니다. 대학생들의 고민이나 자긍심도 부족합니다.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노력, 우리 것을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대학생다운 생각이 절실한 시기입니다. 한편으로는 선배 입장에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도 많습니다. 우리 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강의하는 자리라도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어디에서 우리 춤을 공부하겠습니까. 대학 탈패부터 살려야 합니다."
현실인식이 냉철한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 춤을 발전시키는 과제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공급자나 문화를 수용하는 수요자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했다.
“일제는 우리 춤의 발달을 막아 왔습니다. 너무 화가 많이 납니다. 속이 끓어오르지요. 이런 와중에 우리는 밥그릇 싸움이나 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전통예술이 답입니다. 전통예술을 공부하면서 평등, 평화, 인간과 삶에 대해 많은 고민과 인식을 하게 됐습니다. 상모를 돌리는 동작 중에 ‘이슬털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참 예쁜 이름이지요. 자기 문화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문화도 존중해야 함은 물론, 문화에 각 나라만의 개별성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인도하면 인도의 음악과 춤, 태국 하면 태국의 음악과 춤이 있는 것처럼요. 요즘의 서구 문명은 공룡 같습니다. 마구잡이식으로 잡아먹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재작년 중국을 방문해서 중국 음식도 먹고, 경극도 보고 싶었는데, 록밴드가 나오고 서양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너무 실망이 컸습니다. 난타도 그렇습니다. 그 안에는 극적인 요소도 있지만 비트가 빠른 서구적 방식의 퍼포먼스입니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것을 차용한 소재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락과 리듬에 서양의 것을 차용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전통예술을 발전시키는 음악인의 자세입니다. 전통예술은 대중과 괴리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게 공부하다 보면 전통예술이 과학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과학을 알아가고 찾아가다 보면 전통예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대중들도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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