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최영미 아나운서 - 선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이끌어간다

이동권 2022. 8. 9. 23:16

최영미 아나운서


진한 커피 향이 코를 찌르는 커피전문점. 최영미 아나운서가 더운데 고생이 많다면서 냉커피 들고 나타났다.

"이 세상은 선한 사람들이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겉으로 나타나지 않아도요."

깊이가 부족한 삶을 이끌어주는 한 편의 에세이처럼 마음에 깊이 와닿는 말이었다. 

최영미 아나운서는 1985년 KBS 공채 12기 아나운서로 일하다 2002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당시 그녀는 국악방송 '우리 마음 우리 음악'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본업보다 더 열심히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여성 노숙인 쉼터 ‘열린여성센터’를 돕기 위해 작은음악회를 열고 있었다.

"저도 아이를 기르는 입장에서 말씀드리는데, 요즘 부모들은 자기 아이만 생각해서 문젭니다. 더럽고 지저분한 사람들이 곁에 다가가면 절대로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언젠가는 내 아이가 더럽고 지저분한 사람들과 함께 이 사회에서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면 어울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숙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격리나 외면은 옳지 않습니다"

최 아나운서가 여성 노숙인을 돕은 작은음악회를 열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KBS 제3라디오에서 장애인, 소수자 등의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우리는 한 가족' 진행을 맡았어요. 그 프로그램에서 '서울시 노숙인 다시 서기 지원센터'에서 일하던 서정화 소장이 6개월 동안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게 됐지요. 이 방송을 통해 여성 노숙인의 참혹한 현실을 알게 됐습니다. 남성 노숙인보다 여성 노숙인은 더욱 사회적 편견에 노출돼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소수의 소수자지요. 남성 노숙인들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 여성 노숙인 쉼터 마련에 도움을 주고 싶기도 했고, 그녀들의 입장에 서서 사회의 잘못된 인식들을 바꿔가야겠다는 생각에 작은 음악회를 열게 됐습니다. 쉼터에는 처음 여성 노숙인들은 밤에 들어와 목욕을 하거나 자고 나갔으나, 현재는 가정폭력으로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모자가정이나 정신질환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받은 여성들이 들어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1층은 독신여성들의 쉼터로 70%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며 2층에는 모자가정이 살고 있습니다."

최 아나운서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깨어있는 사람처럼 일목요연했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에서 얻게 된 생활의 습관이 사석에서도 느껴진다.

"시간적인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제가 얻는 것의 일부는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놓기는 어렵겠지만, 벌어서 남 줘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공부해서 남 주냐고 하지만, 남을 줘야 의미 있는 공부가 됩니다. 저는 아나운서입니다. 내 생각, 내 말, 내 행동과 다른 일들이 벌어져도 그것들을 얘기하지 못하고 나이 사십을 넘겼습니다. 진실을 얘기하지 못하고 거짓말하며 살았지요. '나는 마이너다', '겉으로 화려한 것을 거부한다' 하면서 살다 보니 자꾸 직장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20년을 방송하면서 거대 방송사에 대한 환멸과 자괴감도 많이 들었지요.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다,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 철밥통을 그만두게 됐습니다."

여성들이 노숙자가 되고, 또 쉼터에 들어오는 이유는 뭘까?

"여성 노숙인들은 경제적인 이유로만 노숙을 하지 않습니다. 정신질환 때문에 가족들이 버리는 경우도 있고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한 여성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사회는 이런 여성들을 책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 집을 나와서는 보통 음식점에 취직을 합니다. 그러다가 노래방, 찜질방을 거쳐,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거리로 나와 노숙인이 됩니다. 여성 노숙인들은 정신질환이 심합니다. 분열, 착란, 망상에 빠져 있습니다. 내버려 두면 사회병질자가 될 것입니다."

사회병질자는 자기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정신 기능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양심, 도덕, 윤리 등의 정신적인 장애가 있기 때문에 이들은 항상 감정처리가 미성숙하고 책임감과 판단력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사회 규율과 규칙을 어기면서 반사회적이고 사회부적응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아이가 3명인 나이 33살의 엄마가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도 하고 싶은 게 많다면서 어떤 때는 아이들을 후견인에게 보내자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쉼터에 들어와서 마음을 잡고 아이들 잘 기르고 있습니다. 얼굴이 둥그렇고 사슴처럼 생긴 미미라는 여성분은 나이를 무조건 스무 살이라고 얘기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만 하며 매일 일기를 쓰고 지우죠. 일종의 망상입니다. 경찰서에 의뢰한 결과 그녀는 62년생이었으며, 정신질환 때문에 자신의 나이를 실제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 여성은 70~80년대에 일본에서 가수를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한국에 돌아왔는데, 가족들이 받아주지를 않아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명문대 대학원에서 공부한 30대 후반의 한 여성은 노숙을 하며 지내다 보니 폐인이 됐습니다. 사회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는 외모가 됐지요. 그녀는 어려서부터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요. 졸업한 후에는 학원 강사도 하고 그랬는데, 결국 가족과 화해하지 못해 혼자 지내다가 노숙인이 됐고 남들 앞에 서지 못할 만큼 어두워졌습니다.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센터에서 마련해 준 일자리에 취직을 했습니다. 처음 한 달 정도는 고용주가 많이 참았지요.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거든요. 지금은 조금씩 적응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족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영원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쉼터에 오게 되는 경로는 서정화 소장이 노숙현장에 나가 꾸준히 관찰하다가 모시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고, 다른 시설에서 못 견뎌서 소개받아 들어오는 경우도 있고, 이제는 열린여성센터가 홍보가 되어서 찾아오는 분들도 계시는데 음악회도 한몫을 한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더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과 재활을 꿈꾸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 걱정입니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중고지만 에어컨을 달아 준다는 후원자가 계셔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답니다."

최 아나운서는 여성 노숙인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무대를 만든다

"'쉼표를 위한 에튀드'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작은 음악회는 실내악 단체 아마레앙상블, 밸리댄스 송연희와 그의 친구들, 가수 예민과 해와 달, 바이올리니스트 양고운과 기타리스트 안형수, 전문 실내악단 소마트리오,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 가수 최백호, 뮤지컬 배우 길성원, 양준모 등 국내 최고의 음악인들이 무료로 출연한 바 있습니다.  이번 공연에 나오는 음악평론가 장일범 씨는 KBS, MBC, CBS라디오 등에서 음악해설 할 때 늘 불려 다니는 분입니다. 보통 평론가로만 알고 있는데, 러시아 유학할 때 성악을 전공해서 노래도 아주 잘하지요. 흥이 있고 재밌는 분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좋아하실 겁니다. 최고의 뮤지션들이 열린여성센터를 돕기 위해 무료로 나섰습니다. 입장료는 1인당 3만 원, 2인당 5만 원씩이며, 수익금은 모두 여성 노숙인 쉼터를 돕기 위해 쓰이지요. 하지만 무료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미리 말씀만 하시면 자리를 마련해 드립니다. 입장료가 없어서 못 온다고 말씀하지 말고요. 하지만, 입장료를 더 낸다면 거절하지 않습니다."

최영미 아나운서에게 무료로 음악인이나 방송인을 섭외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고 물었다.

"방송생활 20년입니다. 그동안 만나 왔던 인맥으로 뜻있는 방송인과 음악인들의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물론 '노개런티'죠. 큰 비용을 들여야 섭외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출연료가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분들도 좋은 일이라면서 출연료를 받지 않으며,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평소에 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음악 CD나 책도 협찬을 받고 있어 음악회에 오시면 선물로 드립니다. 어떤 분들은 파는 게 좋다고 말씀하시는데, 돈도 중요하지만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입장료를 내고 오시는 분들의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드리는 것입니다. 일산 고전음악감상실 '돌체'에서 공연할 때는 대관료도 안 받았고, 커피도 무료로 제공해 주셨습니다. 너무 폐를 끼친 것 같아 가평에 있는 가일미술관으로 장소를 옮겼지요. 가일미술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국수를 대접해 주셨고 떡, 빵, 과일 등 다과도 함께 준비해 주십니다."

그녀는 음악회에 오면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라서 금방 친해진다면서 이것이 작은 음악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저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거는 수고를 할 때, 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쉼터 노숙인에게도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요. 쉼터 노숙인들도 음악회에 사람이 많이 왔느냐, 자기가 만든 물건이 많이 팔렸느냐고 물어보며 관심을 표현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