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여행과 사색

한라산 - 제주의 하늘과 까마귀를 만나다

이동권 2022. 8. 4. 22:51

진달래밭 대피소

 

제주도는 모든 것이 이국적이고 새롭다. 정교하게 제 풀잎을 잘라 거리를 수놓은 야자수 잎도 그러하고,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을 깎아 만든 돌하르방도 그러하며, 아름다운 빛깔로 넘실대는 초원의 조랑말도 그러하다.

제주도는 울창한 자연림과 청명한 바다가 있어 산 생명들을 먹여 살린다. 자기만 알고 사는 어리석은 인간에게 자연의 은덕을 알게 한다. 풍요와 자비의 이름으로 펼쳐진 성스러움으로 일상의 고단한 마음을 달래준다. 나는 자연만이 물질문명의 유일한 치유책이자 희망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자연만이 인간이 살길이다.

제주도 중앙에는 하늘이 지척에 가깝고 신령스러운 기운과 광대한 초원이 아우러진 곳, 옛날부터 삼신산으로 불릴 만큼 신묘한 명산으로 알려진 한라산이 있다. 제주 중앙을 막고 서서 흐르는 바람을 고요히 멈추어 지친 구름을 잠시 쉬게 한다. 

한라산은 백록담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완만하고 남쪽은 거칠며 가파르다. 그래서 전문 산악인들은 남쪽(관음사) 등산로를 타고 올라가서 북쪽(성판악)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즐긴다. (나는 세 번 한라산을 등반했다. 두 번은 성판악에서 관음사로 내려오는 코스로 일정을 잡았고, 한 번 그 반대로 등반했다.) 

나는 단지 체력의 한계를 이겨내려는 등산에서 어떤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육체와 정신의 어지러움을 떨쳐내고 구도자적인 성찰과 근성을 찾는 것, 그것이 내가 산에 가는 이유다. 다시 말하면 산을 찾는 마음은 정상을 향한 맹목적인 욕망이 아니다. 자연 앞에 서서 겸허하게 삶의 모습을 다지고 꾸짖으며 비로소 깨닫는 행보다. 

한라산 초입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기괴한 나무들이 엉켜 있었다. 봄이면 신록의 물결로 넘실대고, 여름이면 열대의 정글이 되어 뻗어 올랐을 이 나무들은 이국적인 정취를 풍겼다. 엿가락처럼 얽힌 나무 가지 사이로는 하늘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마치, 마지막을 향해 길을 걷는 것처럼 숙연함과 평온함 속에 빠지게 했다.

끝을 짐작할 수 없이 미로처럼 뻗은 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까마귀들이 큰 소리로 울어대자 현기증이 일었다. 사람들은 옆에 있지만 결국엔 홀로 옮겨가는 발걸음, 삶이 영영 가볍고 무한한 것이 아니기에 이 영험한 환영이 내 부끄러운 삶을 짓눌렀다.

 

성판악에서 본 까마귀



그러나 어지럽게 뒤엉켜며, 자신의 방식대로 만족하며 사는 나무들을 보면서 숨통을 튼다. 타인의 삶을 거부하지 않고 존중하면서 살면 그만일 뿐. 뭐라고 지적할 이유가 있으랴. 꺾이어 휘고 굽어 자라면서도 가지 끝마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려는 나무의 용기와 의지를 느꼈기에, 하늘과 땅과 바람을 마주 보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지켜내려는 까마귀들의 날갯짓을 보았기에 그대로 따르려 한 것이다.

청신한 바닷바람이 동서로 뻗은 한라산 줄기를 타고 내려와, 메마르고 엉킨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쓸어 올린다. 답답한 마음속 시름이 사라진다. 천곡의 절경을 아우르는 도인이 된 것 같다.

발 밑으로 하얀 구름이 흐르고 하늘은 텅 비었다. 갖가지 장식들을 떼어내 버린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았다. 넓은 바위 하나 없어 높은 대지가 품어내는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지는 못했지만 번민과 고통 속에 있었던 일상의 일들을 모두 쓸어버리기에는 충분했다. 역시, 현실에의 미련 없이 떠난다는 것은 나그네들의 가장 아름다운 일상이요, 추억이요, 즐거움이다.

크고 넓은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영원히 잠이 들어도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순결한 기분을 선사한다.

 

백록담에서 본 제주


좋은 씨를 뿌리고 건강한 곡식을 걷는 농부의 마음처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곳에 선 의미를 되새겼다. 아, 이 세상에 얼마나 좋은 말씀과 가르침이 많은가. 그러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신을 살펴보는 용기를 지닌 나그네에게는 그런 말씀들은 이미 필요 없다.

미끄러운 눈밭을 여섯 시간 넘게 걸었다. 몸은 쑤셨지만 싸우고, 인내하고, 용서하는 인고의 노력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단순한 것이기에 다시 힘내고 일어나 걸었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가팔랐다. 엉덩이로 미끄럼 타듯 쓸려 내려갔다. 급격한 경사 때문에, 이내 백록담과 푸른 하늘을 조망했던 감동은 사라졌다. 하지만, 우수에 젖은 회색 빛 구름 떼와 앙상한 활엽수 가지 위에 피어 오른 눈꽃들의 형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은 분명히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날은 점점 더 추워지고 고단함으로 인해 성급한 마음마저 찾아왔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갔다. 총총하고 좁은 숲길을 따라, 바다 같이 펼쳐진 설산의 매력을 따라 아주 오랫동안 내려갔다. 눈이 많이 내려 발목까지 빠졌고, 인적마저 드물어 적막함은 무수한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참으로 어리석고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이곳을 걷는 발걸음이 지난날의 사랑노래보다도 아련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득, 시상이 떠올라 나지막이 읊조렸다.

내, 삶이여.
고독한 나그네여.
서로를 아는 이 없으니
모두가 혼자다.
안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
병들고 약해지는 것
푸르게 그대로 바라보아라.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젊은 방랑자여.
그때는 친구도 많겠지만
늙고 병들면 스스로 혼자가 된다.
많다는 것은 없다는 것
지치고 근심스러운 것
머무르지 말고 그대로 느껴라.

내 추구하는 삶에
하나임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영원히 홀로 불타올라
사랑과 위로가 되어주는
이름으로, 사람으로 머물러라.

혼자 떠나는 방랑길.

 


한라산 등산 코스.
성판악 입구 → 속밭 → 사라약수 → 진달래밭 대피소 → 동능정상 → 백록담 정상 → 구린굴 → 관음사 (총길이 18.3㎞ / 9시간 소요됨)

 

성판악 등산로